전주 서문교회 1979

최초의 설명

전주시의 전통적이고 정정한 가로 분위기와 친화감을 가지도록 특별한 축선과 정면성이 없는 조소적 형체의 건축을 시도하였다. 벽돌이 모여 작은 매스를 이루고 이 작은 매스가 모여 하나의 교회 공동체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조형은 80여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이 교회의 고난의 발자취를 상징화하고 있다. 내부는 강당 상부의 종탑에서 쏟아지는 빛이 예배공간의 정점인 말씀의 자리를 더욱 신성화시키고 창에서 흘러들어 온 부드러운 채광과 더불어 신앙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광장에 복원 배치된 옛 종탑은 친교의 외부공간을 더욱 구심화시키고 있다.

작품회고

이성관 소장/ 한울건축
(1997)

정림에서의 6년은 필자의 건축경력에서 잊을 수 없고 소중했던 시간들이었다.

그 시절 그곳에 있는 동안에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이란 계획이나 어떤 야망도 가지지 않고 그저 일과 동료들과 함께 어우러져 여한없이 몸을 뒹군 시기였고 지금 생각해도 멋들어진 경험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지금은 건축계에서 각기 제 목소리를 갖는 “괜찮은” 사람들로 변신될 줄은 그 당시로는 정말 몰랐을 정도로 정림은 그런 사람들로 쉽게, 흔하게 모여 득실거릴 수 있었던 좋은 사무실이었다. 우리는 다른 좋은 곳을 찾지 않았고, 좋은 곳을 그 곳에서 만들려고 했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무실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스스로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려고 했고, 또한 그것들은 어떻게 극복될 것인지가 이슈가 되어 동료들간의 열띤 토론이나 논쟁이 그치질 않았던 시기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가지 예는 가령 이런 것들이었다. 적벽돌의 경우 조적Masonry 기법을 따르지 않고 마치 타일 싸바르듯 사용한다면 재료의 고유한 속성을 무시하는 처사는 아닌가? 또는 시공법상의 기본도 모르는 사이비적 태도는 아닌가? 아니면 소재 사용 가능성의 폭을 한단계 더 넓힌 적극적이고 훌륭한 자세는 아닌가?
오피스 외피가 커텐월일 때 편심코어 옹벽과 인접의 사무실 공간을 같은 유리로 덮을 경우, 옹벽 부위의 유리면은 재료에 대한 모욕인가? 아니면 유리면이 갖는 질감만을 차용한 보다 진보된 해석 방법인가?
그 당시로는 여러 사람을 의문에 빠지게 하고 선택하도록 강요한 윤리적 사안들이었다.

그 당시 김정식 부사장님은 해외로 자주 다니셨고, 돌아오시면 골조노출, 싸바르기 탈피를 누누이 강조하였으나 우리들이 이를 따라가질 못했었다. 그런 요구는 그 당시 필자에게도 우리 사무실로서는 좋은 탈출구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 시절 우리는 설계의 접근방법이나 과정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었고, 작품의 진행도 개개인의 주관적 감각이나 직관에 의존하거나 어떤 종합적 접근방법보다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그리고 조직력에 의한 객관적 사고나 성찰에 바탕을 둔 분석적 접근방법이 사무실 내에서는 팽배해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분석적 방법을 충실하게 거치게 되면 하자 없는 어떤 확실한 대안이 절로 추출될 것을 기대했었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그러하지는 못했었다. 흔히 작품을 설명할 때 ‘이러이러하니 이런 안이 되어야 한다’는 식이지 ‘이러한 안은 이러이러한 점을 갖고 있다’는 식이 아니었다. 직관이나 객관의 조화적 측면이나 이들 간의 균형감각의 배분 훈련은 무시되었던 경향이 있었고, 또한 최종작품의 효과적 측면이나 실리적 혹은 현상적 측면보다는 접근방법의 윤리성이나 명분적 혹은 관념적 측면이 우위였던 시기였다.

당시 사내의 이런 분위기에서 전주 서문교회의 설계과정에서는 초기부터 김정철 사장님의 주관적 이미지가 제시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분명한 파르티Parti였고 작품 전개의 실마리였으며 방법상의 새로운 돌파구였다고 기억된다. 필자 생각으로는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그 과정을 기억해내려 한다.

스케치

본시 사장, 부사장님 두 분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고, 그 당시 노량진교회, 정동교회 등의 실적으로 교회 설계 분야에서도 국내에서는 높은 지명도를 가졌던 터라 전주서문교회의 수주도 순조로웠을 것으로 기억된다. 서문교회측은 서 목사님을 주축으로 한 성전 건립위원회를 만들어 사장님의 프로젝트로 정림에 의뢰하였고 사무실 내에서는 필자가 프로젝트 디자이너로 기회가 주어졌으며 매사 적극적이고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민승렬 대리와 사무실 내 특히 손의 감각이 좋았던 김영민씨가 한팀이 되었다.

나로서는 종교건물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내심 가슴이 설레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동교회로 정림이 여러상을 수상한 직후라 부담이 되기도 했다. 사장님은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셨고 사내에서의 진행전략도 소수인원이 보다 충분한 시간을 갖는 장시 프로젝트로 작정한 소위 ‘질 우선의 프로젝트(Quality Job)’로 채택된 셈이었다. 본디 필자는 과장으로서 전찬진 차장팀에 소속되었으나 이 프로젝트에 한하여서는 사장님과 직접 상의하면서 거의 독립적으로 진행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이 이곳 성전 이미지로 처음부터 생각한 것은 외형만 화려하고 다분히 과시적인 당시의 교회 분위기를 떠나 초기 기독교가 핍박받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카타콤 속에서 이루어졌었던 예배 분위기, 그리고 공간 구성의 다이어그램도 주변의 소공간들이 주공간을 에워싸는 형상을 원하셨다.


전주를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곳에는 타 도시와는 다른 어떤 문맥적 분위기가 도도히 흐르고 있을 듯 했고 서문은 전주 옛 읍성에서 관아의 서쪽에 있는 성문 근방일 것이며 아마도 상 하나쯤은 끼고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하며 현장을 찾았다.
서문교회는 70여 년의 긴 전통을 가지며 전주에서도 가장 역사기 깊은 교회로 이 부분에 대해 이교회에서는 큰 긍지를 갖고 있었다. 본 부지는 기존 교회가 있었던 자리로서 3면이 단층 주거군들로 둘러 싸여 있으며 서측면만이 6m도로와 접해 있었다. 그 불규칙한 형상의 필지들과 가로들은 서측 전주천뚝을 따라 새로이 형성된 신작로와 1/3 정도 접하게 되고 신설 가로면이 2m정도 높게 조성됨으로 해서 주도로면에서 그 만큼 잠겨있는 셈이었다. 그 전주 천 건너편은 낮지 않은 동산으로 다가 공원이 있었다. 대략 900여평정도로 기억되는 이 부지에 북단에는 3개층의 기존 유치원이 장방형으로 놓여 있었고 부지 서남측엔 기존의 한식망루형태의 종탑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기존 6m 도로와 신작로 사이에 형성되는 삼각형 부지를 추가로 새로이 매입하여 둔 상태였다.


대지안의 전개는 배치 기념상 전면에 광장을 두고 그 반대편인 동측에다 주 건물을 배치할 때 주 진입위치(2층에 정전을 둘 때)에 따라 진입 데크(Deck)를 북측에 두는 방법과 남측에 두는 두가지 방법으로 각기 진행되었다가 북측으로 두는 방법이 보다 유리하여 이를 택하게 되었고, 이를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일상성에서 비일상성으로 이르는 공간 영역간의 전이공간으로 이 브리지는 필요하였다. 광장영역은 공로(公路)인 6m도로변까지 연장시키고 나아가 추가 매입한 삼각형 대지까지 확장시키고 대로에 접한 이곳에다가 현 건물규모에 맞는, 동질의 종탑을 배치시켰다. 이렇게 교회영역을 확장시켜 마치 사적인 교회부지위에 공적 성격의 도로를 관통시킨 것처럼 보이게 됨으로서 일반인들도 자연스레 신앙의 영역으로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접하게 하였다. 이 전략을 교회측에서는 무척 좋아 했었다. 한식종루는 기존 위치에 두고 광장구성의 일차적 수직요소로서 축척된 시간을 그 장소에서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대형 수목을 적정 위치에 추가로 식재하여 전체적으로 통합시켰고 건물 외벽의 경계는 광장의 영역 결정 후에 이에 종속시켰다.


그 당시 우리 사무실에서의 스터디 모델은 주로 스티로폼 덩어리를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프로그램 체적을 초기에 감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문제는 디자인 전개 과정에서도 동일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재료의 속성상 매스감이 주조인 설계가 절로 나오게 되고 건물 전체의 구성도 매스의 조합으로 되곤하여 전체적 느낌은 무겁고 답답하였다. 가령 모델재료로 철사(선), 판재(면) 메쉬(Grid)나 유리등과 아울러 썼더라면 훨씬 풍요롭고 긴장감이 높은 조형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유토를 사용하여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모든 형태들은 자연히 동질스킨의 덩어리로 나타나고 종국에 건축화되는 과정에 끼친 영향을 미쳐 녹색유토 표피는 적벽돌로 치환될 뿐이다. 그러니 채광탑부의 둥근 지붕부위도 벽돌로 덮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법상, 관리상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만약 탑 부위를 지붕부위와 몸통부위 둘로 나누어 잘만 구사했더라면 그런 문제점은 해결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곳은 롱샹교회 채광탑 스터코Stucco의 마감 여건과는 분명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프로젝트를 맡아 바쁘게 진행하고 있었던 관계로 공사과정 줄곧 평일보다는 주로 주말을 택해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사과정에서 현장실수 중 용서 못 할 부분은 외장 적벽돌 쌓기에서 발생하였다. 도면상에는 1B정도의 안으로 들어간 부분이 표현되었으나 현장에서는 생략해 버렸다. 그 홈은 외관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현장에서 장식정도로 생각하고 없앤 것이다.
가령 벽과 메스가 동일면상에서 만날 때 그 홈은 두 요소간의 관계 혹은 만남을 뺄 수 없는 단서라고 보았는데 그것이 사라져 버리니 소위 떡칠되어 버린 것이다. 매 중요요소마다 도입된 이 디테일이 모두 생략돼 버렸으니…. 현장소장은 착실한 분이어서 그것이 왜 여기서는 그리 중요한가를 설명을 듣고 난 후 몹시도 미안해 했고, 필자는 그 나이에 철없이 그분에 심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연후엔 시공자에겐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는 설계상의 중요한 부분을 공사전 반드시 주지시키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필자가 뉴욕에 있었던 어느 해인가 서울로부터 송년 카드를 받았다. 흑백사진 한 컷이 담긴 카드를 떠내는 순간 그 장면이 무엇이었는지 몰랐어도 그 짧디짧은 순간에 거의 동물적으로 아니면 직감적으로 어떤 혈육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바로 낯익은 교회 채광탑의 내부를 교묘히 올려본 앵글이었다. 방철린씨가 보낸 카드였고 훗날 방형이 직접 찍은 것이라 했다. 오랜 기간 망각속으로 접어둔 장면이었다.
귀국한 직후 맨처음 찾아간 곳은 전주였다. 늦여름 어느날의 저녁께였다. 문득 돌이켜보니 어언 6여년의 세월이었고 텅빈 실내를 구석구석 둘러보니 그 시절이 불보듯 생생하게 다가오고…. 회상을 위해 어떤 장소라는 게 이렇게 강렬한 최면을 걸 줄 몰랐었다. 서 목사님은 그땐 마침 안 계셨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어스름한 중복도의 끝 한쪽 구석방에 두 젊은이가 저녁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안 그러리라 기대하고 “이 건물은 문제점은 없느냐” 물었더니 묻는 이가 누군지 모르고 “오래되어서 그런지 계속 수리를 합니다.” 하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대청마루 정림건축 설계정보지 제15호》, 1997, 44~47쪽

도면

배치도
외벽 및 중2층 단면 상세도
예배당 음향계획
소예배실 및 성가연습실 음향계획
조명기구 설계 상세

사진

교회 전경
한옥 밀집지구에 위치한 서문교회
외벽상세
남서측 친교광장 전경
서측 전경
종탑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와 유리블록
스테인드 글라스와 유리블록
내부 벽 상세

설계 크레딧 및 건축 개요

설계: 김정철 
위치: 전북 전주시 다가동  
대지면적: 3,001.70m2 
건축면적: 1,057.00m2 
연면적: 2,820m2  
규모: 지하1층, 지상3층
외장재: 붉은 벽돌 치장쌓기
연도: 1979
준공: 1983. 12. 

자료 및 정보 출처

∟ 웹아카이브에 공개한 자료 및 정보의 원본(혹은 사본)에 접근할 수 있도록 출처를 밝힌다.
∟ 항목의 괄호 속 숫자는 정림건축 내부에서 관리하는 프로젝트 번호(프로젝트의 실행 시기나 자료의 생산 시점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
∟ 자료의 명칭은 검색 및 조회가 가능한 것으로 밝힘(해당 자료 원본의 명칭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
∟ 《김정철과 정림건축 1967-1987》, 2017, 186~193쪽.
∟ 이성관, ‘전주서문교회'(작품회고, 한울건축), 『대청마루 정림건축 설계정보지 제15호』, 1997, 44~47쪽.
http://www.junglim.com/works/design/347/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