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안의 건축가

1세기(*원문 대로 옮긴 것이나, 의미상 ’21세기’를 뜻하는 것 같다.) 기업경영은 ‘인재경영’이라고 한다. 능력 있는 인재를 뽑아야 하고, 그 인재를 어떻게 관리, 성장시키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패가 좌우된다. 우수인재의 확보가 다른 어떤 투자보다도 회사를 키우는 가장 확실한 경쟁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기업들은 우수인재를 선점하기 위해 사활을 건 유치경쟁을 벌인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야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경영 패러다임과는 질적으로 다른, 엄청난 인식의 변화이다.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를 떠올려본다면 격세지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누구도 우리를 인재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우리 자신도 자신의 노동을 곧바로 돈으로 환산할 줄 몰랐다. 건축사무소에 취직을 한다는 것의 목적이 우선 돈벌이가 아니었다. —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건축사무소도 거의 없었다. — 우리는 그저 스승님께 더 배움을 구하는 착실한 수련생으로 차비나 받고 용돈이나 얻어 쓰는 것으로도 만족했던, 전형적인 도제徒弟시스템의 후예들인 것이다. 존경하는 스승님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낭만이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쯤으로 들릴 것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세월이 그렇게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세상 사는 이치가 있다. 자신의 길을 찾아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람들을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확한 숫자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정림건축을 거쳐 간 직원들이 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인간적 도의나 인정을 내세워 그들을 붙잡지 못했듯이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시절에도 그 이치는 마찬가지였다.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아 떠나야만 하는 제자들을 스승님은 붙잡을 수 없었다. 섭섭해하면서도 등을 두드려주시며 나가서 잘하라고 격려해주시던 것이 스승님이 제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었다.

1956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나는 3년 남짓 ‘종합건축연구소’에서 일했다. 이천승 선생님과 김정수 선생님이 이끄셨던 ‘종합건축’은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큰 건축사무소였다. 이천승 선생님은 경영 감각이 뛰어나셨고, 미국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에 대해 연구하고 돌아오신 김정수 선생님은 창의적 아이디어와 디자인 감각이 탁월하신 분이었다. 두 분에 대해서는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종합건축’ 수련 시절에 배운 것들이 ‘정림건축’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분들이 나에게 끼친 정신적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종합건축’ 시절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건축적 수련 기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거세게 흘러가는 시대의 강물로부터 유유자적할 수는 없었다. 낭만이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는 데 한계가 온 것이다. 더구나 나는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생활 방편이 없으신 부모님과 한창 배울 나이의 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장남으로서 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안정된 보수와 전공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은행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조금씩 회생의 기미를 보이자 가장 먼저 활기를 찾기 시작한 곳은 금융기관이었다. 당시 은행은 합리적이면서 국제적 감각을 지닌 우리 사회의 테크노크랫이 모이는 국내 최대의 엘리트 집단 중의 하나였다. 최고의 보수와 대우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재능 있는 많은 건축가 수련생들이 건축사무소에서 은행으로 밀물처럼 밀려갔다. 산업은행의 주택사업기관인 ICA 기술실에서 일할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가 왔을 때 나 역시 ‘종합건축’을 뒤로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ICA 기술실에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엄덕문, 김중업 씨 등이 책임자로 있었다. 또한 많은 건축가들을 끌어들일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일거리가 있었다. 보건사회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주택들을 효과적으로 건설하기 위해 ICA 자금으로 ‘전국주택설계 현상공모’를 실시하기도 했다. 1958년 3월에 제1회 현상설계에서 나는 제4부 ‘동리계획’ 부문에서 안영배 씨와 공동작품을 출품하여 1등을 수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규모로 집단주택을 짓는다거나 계획적인 주거단지를 조성해본 경험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동리계획’은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일종의 마스터 플랜으로 당시의 건축적 현실, 건축계가 해야만 될 시급한 사회적 요구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ICA 기술실에서 6개월 남짓 일한 이후에 나는 한국은행 영선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한국은행 영선과에는 전창일 선생님이 책임자로 계셨는데, 나의 어려운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천승 선생님이 추천을 해주셨다.

5천 원의 월급을 받고 ‘종합건축’에서 일했던 시절과 비교한다면 한국은행은 말 그대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최상의 직장이었다. ‘종합건축의 무려 여섯 배가 넘는 월급에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수시로 지급되는 상여금,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그에 따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들, 한국은행에서 10년을 근무하면서 나는 각종 지점 계획과 설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전기를 맞는 수많은 변화들을 맞이했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들 셋을 낳았으며, 부모님을 봉양했고, 동생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단란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생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가정을 안정되게 꾸려가고 있을 즈음, 동생 정식이 찾아왔다. 나와 같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6년 동안 충주 비료에서 일했던 동생은 제4 비료공장인 진해화학 건설에 참여하여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형님, 우리도 건축사무소를 엽시다. 이젠 우리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1966년 여름이었다. 나는 돌연한 제안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름의 건축사무소를 내고 독립된 건축가로 일할 수 있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갈망해왔던가? 언젠가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동생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을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심사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사무실 얻을 돈도 없는 형편에 건축사무소를 열어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가 성장가도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건축 여건은 여전히 열악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고, 동생도 나도 현장에서 설계 경험을 쌓을 만큼 쌓은 후였다. 동생과 내가 쌓은 경력과 인맥, 그 두 힘이 합해진다면 전혀 승산 없는 도전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 안정된 직장 안에서 생계를 위한 설계가 아닌, 건축가로서의 꿈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도전을 해야만 할 시기가 왔던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다! 하자! 함께 해보자. 하지만 조건이 있다. 우선은 네가 먼저 건축사무소를 열어라. 사무실을 얻고 당장 급하게 들어갈 운영자금은 내가 전부 대주겠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은행에 남아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무실이 정상 궤도에 오를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안정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있어야 유지가 될 것 아니냐? 틈나는 대로 도와주마. 당분간은 네가 혼자서 사무실을 꾸려가는 것으로, 그렇게 한번 시작해보자.”

“좋습니다, 형님.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동생의 눈빛이 그때만큼 빛났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창한 악수를 나누지도, 대단한 맹세를 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같은 건축과를 졸업하고도 나는 금융 분야에서 설계 계획과 디자인을, 동생은 산업 분야에서 기능과 구조를 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왔는데, 마치 이런 순간이 오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고 간단하게 의기투합이 된 것이다.

나는 을지로 입구 부근의 자그마한 적산가옥 한 채부터 빌렸다. 당시 동산토건의 사장님을 알고 있었는데 그 회사 건물 뒤편에 방치하다시피 내버려 둔 비가 줄줄 새는 창고 같은 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그나마도 빌릴 돈이 없으니 무료로 쓰게 해달라고 간청해서 얻을 수 있었다. 폐가나 다름없던 집을 급한 데로 손보고 집기들을 구해오고 직원들을 뽑고 실질적으로 개업 준비를 한 것은 동생의 몫이었다. 몸이 은행에 묶여 있으니 달려가 보지도 못하고 동생이 혼자서 고생을 다 했다.

변변한 창업자금 한 푼 없이 형제가 그렇게 동분서주한 끝에 정림건축연구소가 문을 연 것은 1967년 6월 17일이었다. 네 명의 직원에 서른여 명의 하객들을 모시고 조촐한 개업 행사를 가졌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어 썰렁하기만 했다. 제도판과 삼각자, 스케일, 몇 권의 참고서적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동생도 나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내 나이 서른여섯, 동생의 나이 서른셋, 우리에겐 젊음과 건축에 대한 열정과 피를 나눈 형제만이 나눌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정식이 누구보다 사무실 운영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이후 퇴근 후 내 발걸음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정림건축연구소로 향했다. 일거리가 없어서 이삼십 평짜리 주택 설계 건이라도 하나 들어오면 와, 환호성을 질러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서너 명의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디자인을 하는 일 따위가 알콩달콩 재미있고 신이 났다. 안정된 조직 안에서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있던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새록새록 다시 피어나는 듯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은행을 그만두고 정림건축연구소에 내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내가 마음속 깊이 정말로 원해 왔던 자리는 은행의 안락한 의자가 아니라, 건축사무소의 딱딱한 드로잉 테이블 앞이었다. 하지만 정림건축연구소로 돌아가고 싶은 내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은행에서 은행으로 이어지는 인연이 다시 한번 건축가 김정철로 독립하는 것을 허락해 지 않았다.

1969년, 국내 최대 규모의 자본으로 금융계 선두를 달리고 있던 외환은행이 명동에 본점을 지을 계획으로 설계팀을 꾸리고 있었다. 그 팀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고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일거리가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었던 시절에 초고층 건물을 설계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다니! 나는 또다시 외환은행 직원으로 은행밥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음에는 수입이 일정치 않은 건축사무소를 뒷받침하기 위해, 마지막으로는 외환은행이 아니면 해볼 수 없는 설계 경험을 위해 나는 은행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산업은행, 한국은행, 외환은행까지 금융기관 경력만 꼬박 15년이다. 내 건축 인생의 3분의 1을 고스란히 은행에서 보낸 셈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배우고 얻은 생생한 체험이 훗날 외환은행 본점 현상 공모에서 내게 당선의 기쁨을 안겨 주고, 수많은 은행 본점의 설계를 석권하다시피 하는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주었으니 미래의 일이란 언제 어떻게 될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내게 그토록 오랜 세월 은행에서 일할 기회를 주신 것도 더 큰 일을 맡기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니 하나하나의 인연을 맺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신이 서 있는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소중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