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이익

불혹을 눈앞에 둔 삼십 대의 끄트머리 즈음에 혼자 남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무언가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쐬러 갔던 것인지, 그저 점심식사 후에 산책 삼아 올라갔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남산타워를 둘러싼 성곽 앞에 센치해진 기분으로 서 있던 내 모습과 한눈에 잡힐 듯 내려다보이던 서울이라는 도시의 무표정한 살풍경이 선명한 기억의 영상으로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가난의 냄새가 곳곳에서 풍겨 나오는 회색빛 도시를 내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터뜨렸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유구한 민족인데, 왜 우리는 한국적이라고 불릴 만한 도시의 느낌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폐허 위에 급조된 건물들은 하나같이 거친 시멘트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인데 왜 그날 따라 그 살풍경이 더 크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면서 가슴이 아려왔던 것인지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라 더욱 대비가 되고 안타까웠던 것이다.

현대문명의 위용을 마음껏 뽐내던 미국 대도시의 마천루들, 고색창연한 빛을 내뿜으며 세계 문화의 중심지임을 자랑하던 구라파의 유서 깊은 도시들, 미국과 유럽을 횡단한 40일간의 세계 여행은 내게 도시의 빛깔에 눈을 뜨게 만드는 새로운 경험이 되어 주었다. 나는 세계 유명 도시의 건축물들이 빚어내는 화려하고 창연한 빛깔의 조화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말, 개인 자격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하던 시대에 40일간의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행운이었다. 외환은행 설계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초고층 건물을 설계해볼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들어갔던 외환은행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설계안을 완성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외환은행의 내부 사정으로 본점 신축 계획 자체가 불투명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설계팀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100% 은행의 지원으로 서구 선진국의 건축 동향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해외여행의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훗날,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시찰이 값진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 기회가 온다면 도시의 느낌부터 특색있고 화사하게 바꾸자, 자연과 조화되는 빛깔, 도시인의 생활에 활력을 주는 빛깔, 한국적인 빛깔……’ 그날 오후,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한참을 그렇게 되뇌며 남산 꼭대기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빛깔을 입혀줄 물감과 붓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창백한 도시, 서울. 그것은 더이상 서글퍼 하거나 가슴 아파해야 할 일만은 아니었다. 불모지란 무한한 가능성과 개발의 기회가 잠재되어 있는 땅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무명의 건축가인 나에게 미개발의 서울은 그만큼 많은 도전의 기회가 열려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환은행 건설 담당 본부장으로부터 뜻밖의 진화를 받은 것은 1973년, 어느 날이었다.

“김정철 씨, 본점 현상설계한다는 이야기 들었죠? 이번 공모는 국내 유명 건축가 열두 명만 초청해서 안을 받는 지명 현상설계입니다. 김정철 씨도 추천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외환은행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니까 기성작가들보다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기대하지도 않았던 담당 본부장의 고마운 전화 한 통에 나는 순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김중업, 김수근, 나상진 씨와 같이 이미 건축계에서 명성과 업적이 입증된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과 함께 경쟁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들과 경합을 벌여 당선되리라는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될 천금과도 같은 기회가 왔음은 직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거대한 빌딩 숲으로 변모한 을지가로에 평범한 고층빌딩으로 서 있는 외환은행 본점이지만, 그 건물은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명동 지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을지 도심개발의 효시적 사업으로, 무엇보다 초고층 빌딩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건물로 을지로와 명동의 개발이 그 건물로부터 뻗어 나가 오늘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천만 원이라는 사상 초유의 현상금, 열두 명의 엄선된 건축가에게만 주어진 얻기 어려운 기회, 공모 과정의 투명성, 모든 면에서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는 국내 최초의 제대로 된 공모전이라고 할 만했다. 거기에 당선된다는 것은 그 이후로 쏟아져나올 대형 은행프로젝트를 선점할 수 있는 엄청난 경력과 평가를 얻게 되며, 그것은 정림건축과 같은 이름 없는 건축사무소에게는 명성과 성공의 에스컬레이트로 이어지는 도약의 발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팀을 꾸려 설계안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새벽 별을 보며 출근해 통금 직전에 퇴근하거나 아예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철야 작업이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은행에서 근무한 나는 은행이 어떤 기능을 필요로 하는지, 그 기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적합한 디자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분석과 토론이 이어졌고, 새로운 디자인 안이 나올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에 불꽃이 튀는 비평이 쏟아졌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것처럼 꿈도 꾸지 못했던 초대형 프로젝트를 눈앞에 두고 우리는 그동안 목말랐던 작가적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라도 하려는 듯 아낌없이 열정을 쏟아냈다.

공공의 이익과 도시환경에 기여하는 건축을 하면서 어떻게 건축물 고유의 기능과 이미지를 부각시킬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세운 기본전제였다. 건축주를 만족시키는 건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용자들, 오고 가며 건물을 보게 될 불특정 다수, 도시환경과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요구와 이익에 부합하며 건축이 담당해야 할 사회적, 시대적 책임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안을 제안할 것인가?

이것은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있는 내 건축 철학의 핵심이며 기초이다. 돈을 받는 대가로 건축주의 입맛에만 맞추는 건축도 지양되어야 하지만, 작품이라는 미명 하에 건축가의 작가적 욕심만 앞세우는 작가주의적 건축 또한 경계되어야 한다. 일단 건축적으로 실현된 건물은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의 작품이냐를 떠나 공공의 성격을 부여받는다. 누구나 보고 즐기며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건물, 도시환경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건물. 요컨대, 건축주뿐만 아니라 그 시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최상의 건축물로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해야 할 직능적 사명감이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공공의 건축’을 지향하고자 하는 우리의 소신과 의지는 외환은행 본점 설계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35층 안을 완성했다. 기본 개념은 타워 앤드 포디움Tower & Podium에 역점을 두었다. 본점은 전체를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로, 뱅크로 이용될 영업장은 포디움으로 고층부와 저층부로 대비 시켜 설계했으며, 외부 공간은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최대한 배려했다. 지하이지만 지상으로 열려 있도록 선큰을 도입하고, 외국의 은행들처럼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울타리를 없앴다. 울타리가 없어진 옥외 공간은 시민을 위한 개방 공간으로써 조경을 마련하고 유명작가들의 조각품과 미술품을 배치하여 문화적 광장을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그때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새롭고 획기적인 건축적 아이디어였다.

건물의 외장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토론의 쟁점이 되었다. 건축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재료가 타일이 고작이던 시대라 별 대안이 나올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색깔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로 공방이 오고 갔다.

“진달래색, 어떻습니까?” 

내 제안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색깔이 너무 튀는 것 아니냐, 건축주를 설득시킬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즉각 제기되었다.

‘우리도 이제 회색, 갈색 일변도에서 좀 탈피합시다. 서울도 화사하고 활력이 느껴지는 도시, 문화도시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건축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몇 년 전,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살풍경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던 나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봄의 산야를 화려하게 물들이는 진달래꽃처럼 외환은행 본점을 시작으로 울긋불긋한 색의 향연이 도시 전체로 번져나가 서울이 보다 생동감 넘치는 도시로 변모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가슴 깊이 품어왔던 건축가로서의 내 오랜 바램이기도 했다. 결국 설계안은 내 고집대로 엷은 진달래색 외장의 타일과 화강석으로 마무리되어 제출되었다.

그로부터 몇 주일 후, 우리는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낸 설계안이 당선되었다는 우리 자신조차도 믿기 어려운 낭보를 듣게 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기성작가들과 경쟁하여 정림건축이 초대형 프로젝트의 설계자로 당선되었다는 것은 건축계의 이변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이었다. 경력이나 지명도에 상관없이 설계안만을 가지고 공정한 심사를 해준 외환은행이 아니었더라면 이루어내지 못했을 성과였다.

이름 없던 작은 설계사무소에 불과했던 정림건축이 일약 건축계의 기린아로 부상하며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날, 그날은 잔칫날이었다. 그날만큼은 우리 모두 어린아이들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감격과 기쁨의 순간을 만끽하며 기뻐했다.

외환은행 본점의 당선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에도 신탁은행, 산업은행, 대구은행 등 여러 은행 본점 현상설계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던 그날의 감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외환은행 본점의 실시설계를 하면서 40여 명에 불과하던 직원의 수가 순식간에 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구조, 기계, 전기, 방재, 조경, 시방, 환경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속속 정림건축의 지붕 아래로 모여 들였다. 이른바 ‘조직화에 의한 토털디자인’의 인프라가 갖추어져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토털디자인Total Design’이라는 건축개념은 정림건축이 처음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건축에 관련된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동 설계, 조직 설계를 통해 ‘토털디자인’을 추구함으로써 보다 안전하고 완벽한 건축, 건축주와 사용자를 함께 만족시키는 건축을 하겠다는 정림건축의 건축 이상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정림건축이 토털디자인을 추구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정식이 주택은행 대구지점을 갔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점장을 만났는데 난방설비가 잘못되었다고 잔뜩 볼멘소리를 하더라는 이야기였다. 보통 기름 탱크차 한 대가 한 번에 공급해주는 기름이 100드럼인데, 대구지점은 50드럼짜리 탱크 용량으로 설비 설계가 된 모양이었다. 50드럼을 운반해주는 탱크차는 거의 없고, 어쩔 수 없이 100드럼 탱크차를 불러서 기름을 넣어야 하는데,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급유를 하게끔 설계를 하였으니 번거롭기도 하고, 기름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불안에 떨면서 겨울 내내 기름통만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괴로워서 혼났어요. 도대체 건축가의 책임이 어디까지입니까? 기름탱크가 몇 드럼짜리가 필요한지, 시중에 몇 드럼짜리 탱크차들이 있는지, 어떻게 일일이 다 체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토털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사실 기계니, 전기니, 난방이니 협력전문 업체에 맡겨서 설비를 가져오게 해도 건축가에겐 그것을 정확히 판별할 능력이 없다. 아니 건축가 한 사람이 그 많은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건축가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결론에 다다른 것이 바로 ‘토털디자인’ 이었다. 아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팀으로 정림건축 내에 둠으로써 설계 초기부터 조직적으로 전체를 함께 검토하고 협의해서 보다 질 높은 설계안을 완성하자는 것이었다. 기계설계팀이 가장 먼저 생겼고, 그 이후로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는 전문가들을 하나둘 불러모으기 시작했는데, 외환은행 본점의 실시설계를 하면서 ‘토털디자인’의 체제가 완전히 갖추어지게 된 것이었다.

외환은행 본점은 완공까지 8년이 걸렸던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수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짓고자 했던 계획이 좌절되고 만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 일이다.

어느 날, 시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당시 시장이 명동의 외환은행 모형을 보여주며 달라질 도심의 미래상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답은 딱 한 마디였다고 한다.

“고층빌딩을 짓고 도시가 팽창하는 것도 좋지만, 교통 문제를 염두에 두라.” 이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시장이 내린 결정은, 어이없게도 건물을 낮추라는 것이었다. 비싼 외화를 들여 수입해온 철골이 무용지물이 되고-훗날, 다른 건물을 짓는 데 이용하기는 했지만- 27층으로 계획되었던 건물은 24층으로 속절없이 잘려져야만 했다. 건물의 비례가 깨지는 아픔 속에서 1981년 외환은행 본점이 완공되었을 때, 그래도 사람들은 ‘명동의 오아시스’란 아낌없는 찬사로 외환은행 본점의 탄생을 축하해주었다.

울타리가 없어진 은행, 연못과 낙수, 정원으로 전개되는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기는 선큰가든 sunken garden…… 그에 못지않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진달래색의 강렬한 외장이었다.

외환은행 본점의 외장은 대리석이라고 착각할 만큼 재질이나 색상이 그때까지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타일이었다. 일본 아리타에 수백 년 전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도예공들이 대를 이어 전업으로 타일을 굽고 있는 마을이 있는데, 내가 직접 가서 보고 골라온 것들이었다. 세월이 흐르더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타일 두께를 똑같이 뽑고, 뒷면에 홈을 파서 직접 붙여 고정시키는 표면처리술도 수십 번의 실험을 거친 끝에 성공시켜낼 수 있었다. 

지금이야 굳이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보러 명동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점심시간이면 명동의 새로운 명소를 구경하러 온 인근의 화이트칼라들로 외환은행 본점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약속의 장소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은행의 기능을 뛰어넘는 공공의 장소로 한 시대의 사랑을 톡톡히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1969년에 인연을 맺어 1981년에 유종의 미를 거둔, 장장 13년에 걸친 외환은행 본점에 얽힌 뒷이야기이다.

순수한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로 만든 한국 최초의 고층 빌딩, 공공의 이익과 도시환경과의 조화에 기여하는 건축을 추구하고자 했던 한 무명 건축가의 꿈이 현실로 실현된 건물.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세월만큼 깊이를 더해가는 멋을 자랑하며 도시인의 쉼터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상해보라. 거리를 걷다가 만나게 되는 건물 하나하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건물만의 역사, 그 건물을 만든 건축가의 이상과 애환, 그 건물만의 존재 이유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도시의 건축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좀 더 즐겁고 흥미진진해지지 않겠는가? 그 상상의 폭을 넓혀주는 것, 보다 적극적으로 건축 읽기를 도와주는 것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