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의 해후

2003년, 나와 동생은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요코하마의 한 호텔에서 열리는 소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대련에 살던 시절, 우리는 일본인 학교인 향양向陽 소학교를 다녔다. 해방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오면서 소식이 끊겼던 동문들이 격년마다 동창회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일본으로 향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알려준 일본인 친구를 통해 꼭 만나 뵙고 싶은 분이 있으니 수소문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다름 아닌, 3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하라原, 라는 이름의 여선생님이었다.

“김상, 찾았어. 이제 하라가 아니고 남편 이름을 따서 가시와기 가오루로 이름을 바꾸셨지. 오사카에 살고 계시는데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이야. 김상 이야기를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이번 동창회에 꼭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어.”

그 소식을 듣고 어찌나 기쁘고 감사하던지 당장이라도 선생님이 살고 계신 오사카로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갓 열아홉의 당당하고 활달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바뀌셨을까? 알아볼 수나 있을까? 건강이 안 좋다는데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신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36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을 지배했던 일본인 여선생님을 이토록 간절하게,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가는 나의 심정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번 수학시험에서 가네야마 마사시오가 100점을 받았어. 대단해. 너희들도 가네야마를 본받아서 더욱 분발하도록! 알겠지?”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피지배 민족으로 차별을 받으며 힘겨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나를 학생들 앞에 세우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칭찬해주시던 하라 선생님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하라 선생님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별 없이 사랑과 엄격함으로 가르쳤던 몇 안 되는 선생님 중의 한 분이셨다. 일본말이 서투르다고, 마늘 냄새가 난다고, 조센징이라고 나를 못살게 굴던 일본 아이들을 가차 없이 혼내시기도 하셨다. 첫 부임지였던 향양 소학교에서 선생님은 딱 일 년을 가르친 후에 전근을 가셨는데, 그 일 년 동안이 한 조선인 소년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얼마나 소중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는지 아마 선생님 자신도 알지 못하실 것이다.

“넌 일본인들보다 더 잘할 수 있어!”

늘 기가 죽어 있던 나에게 선생님의 그 격려 한 마디는 정말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진짜로 나는 일본인 아이들을 ‘꼬붕’으로 삼아 대장 노릇을 할 정도로 활기차게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 격려는 ‘나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로 바뀌어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내 인생의 신념이자, 좌우명이 되었다. 

칭찬과 격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하라 선생님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일본인이기 때문에 더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행동으로 보여준 그녀를 나는 어머니만큼이나 가슴 속 깊이 그리워하고 존경하며 살아왔다. 그런 선생님을 60년 만에 다시 만나 뵙게 된다고 생각하니 몸은 요코하마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어느덧 60년 전 중국 대련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전쟁의 암운이 깃들어 있던 광활한 중국 대륙, 보고 듣고 만나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로웠던 이국에서의 그 낯설고 특별했던 경험이 내 인생에 남긴 의미들을 다시 한번 더듬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중국 대련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사업 때문이었다. 평양의전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평양에 처음으로 미제 자동차 두 대를 들여와 운전학교를 여신 아버지의 사업은 얼마 못 가 실패하고 말았다. 한 대는 견습생이 주유를 하면서 성냥불을 켜는 바람에 전소하고 말았고, 다른 한 대는 운전도 할 줄 모르는 숙부가 차를 끌고 나갔다가 모란봉 계곡에서 사고를 내는 바람에 망가지고 말았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아버지는 의사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련으로 건너가 운수 사업에 뛰어드셨다. 택시 두 대를 사서 기사를 두고 운영을 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럭까지 굴릴 정도로 성공을 하셔서 가족을 대련으로 불러들이셨다. 1938년,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대련 제3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어 평양으로 돌아왔으니 여섯 살에서 열네 살까지 유소년기의 대부분을 대련에서 보낸 셈이다.

대련은 ‘동양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한때 러시아의 조차지로 서구를 동경하는 일본인의 취향이 십분 발휘된 계획적으로 조성된 현대적 도시였다. ‘중앙공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커다란 조각상이 있던 원형의 광장이 로터리처럼 가운데 있고, 거기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길이 도시 곳곳과 연결되었다. 프랑스 파리를 연상시키는 잘 짜여진 도로망과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현대식 건물들의 환상적인 조화는 ‘아, 이런 곳이 도시로구나!’ 하는 감탄을 절로 나오게 했다. 기술적으로도 미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려함과 정교함을 뽐내는 유럽식 건축물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아름다운 건물들을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훗날, 의사나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건축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데는 대련 시절에 받았던 도시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가장 큰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대련은 내게 도시와 건축의 세계에 일찌감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물은 현대적으로 설계된 대련 역사이다. 만주나 하얼빈, 봉천으로 가려는 인파로 언제나 북적거렸던 대련 역사는 건물 외관의 화려함 못지않게 입체적인 동선의 현대적 기능을 갖춘 건물로 눈길을 끌었다. 즉 도착 층과 출발 층의 동선이 분리된, 당시로써는 볼 수 없었던 입체적으로 설계된 건물이었던 것이다. 출발 층이 이층이고, 아래층이 도착 층인데 광장으로 나오면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분명 중국이 아닌, 유럽의 어느 도시를 옮겨다 놓은 듯한 최첨단 도시 문명의 중심지였다. 도시 하나를 완전히 새롭게 조성한 그 엄청난 재원을 어디에서 끌어왔느냐 하는 문제만 따지지 않는다면 일본인들의 모방능력과 도시를 유지 관리하는 능력에는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공원의 나무 한 그루, 조각 한 점도 도시 조경과 조화를 이루지 않은 것이 없고, 어찌나 쓸고 줍고 가꾸는지 길거리에서 쓰레기 한 점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

대련은 낮보다는 밤이 더 아름다운 도시였다. 연쇄가라고 상점들이 즐비해 있는 거리가 있었다. 오렌지빛 가스등이 하나둘 켜지는 어스름 저녁이면 상점들도 휘황찬란한 불빛들을 뿜어내기 시작하는데, 조선에서는 볼 수도 없는 온갖 희귀하고 아름다운 상품들이 진열대마다 가득 쌓이고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거리는 순식간에 활기가 넘쳐흘렀다. 나도 이따금 아버지나 누이를 따라 마차를 타고 그 밤거리로 쇼핑을 나가곤 했는데 운이 좋은 날이면 진귀한 학용품이나 옷가지, 스케이트 같은 것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대동아 전쟁이 시시각각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도 전쟁이 비껴간 듯한 그 거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넘쳐나는 물자의 풍성함과 이국적인 불빛이 자아내는 낭만이 언제까지고 그 밤거리를 가득 메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은 다른 민족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억압 위에서 구가되는 그 사치와 방탕의 욕망을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았다. 향양 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련 제3 중학교에 입학했던 그해 여름, 폭염이 온 대지에 내리붓던 그날, 나는 교정에서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종전 발표를 들었다. 일본 학생들은 곳곳에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한꺼번에 용솟음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제2 국민이었던 내게, 차별과 설움 속에서도 울분을 삼키고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던 내게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큼이나 놀랍고 혼미한 감격, 그 자체였다.

한편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도시 대련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일본인들은 나라가 망하자 서둘러 귀국하기 위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온갖 값진 물건들을 팔려고 내놓았다. 일본인들이 가장 아끼는 가보로 내려오는 명검, 보석과 값진 가구, 귀중한 도자기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놀라운 것은 중국인들 어느 누구도 그 물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인적 이익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다리는 대륙성 기질, 중국인들의 ‘만만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편, 대련으로 들이닥친 소련군들은 닥치는 대로 행인들의 물건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우리 집에까지 한밤중에 총을 든 소련군들이 난입해 어머니가 숨고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중국 속의 유럽을 만끽했던 대련의 아름다웠던 한 시절은 그렇게 마감되었다. 승전국 군인들의 약탈과 겁탈, 무법천지의 아수라장을 빠져나가기 위한 패망국 국민들의 도주와 수난의 행렬의 참혹하게 이어졌다.

60년이라는 그 긴 세월의 공백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까?

요코하마의 한 음식점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낯선 일본인들 틈에 둘러싸여 정종 잔을 기울이면서 나와 정식은 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련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에 반가운 마음으로 거기까지 달려갔지만 정작 기억나는 얼굴도,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란 것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불쑥 나타난 한국인 동창생들이 무조건 살갑고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60년 전 그들에게 차별받고 설움 받았던 과거와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비참하게 대련을 떠나야 했던 마지막 순간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을 것이다. 약간은 겉돌고 어색했던 분위기를 일순에 화기애애하게 바꾼 것은 역시 하라 선생님의 등장이었다.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반갑고 감사했어요. 건축가로 성공하셨다고요? 정말 훌륭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대단해요.” 여든을 넘은 나이었지만, 활달하고 상냥한 성격은 열아홉 살의 하라 선생님 그대로였다. 외출조차 못 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신데도 나를 만나러 남편과 함께 그 먼 길을 달려와 주셨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선생님은 평생을 교직에 계시다 은퇴하셨고, 남편분도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다고 했다. 가시와기 씨는 나를 위해 선물까지 준비해오셨다. 한 번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가(一期一會) 하는 글귀를 담은 자그마한 액자였다. 그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나는 다시 한번 두 손 모아 감사드렸다.

사실 하라 선생님을 만나러 요코하마로 향할 때 내 마음속에는 소망이 한 가지 있었다. 너무도 좋아하는 스승이기에 ‘예수님’을 믿도록 꼭 전도하고 싶은 것이었다.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종교가 있느냐고 여쭈었는데, 두 분이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인구의 1%만이 기독교를 믿는 나라인데, 그 1% 안에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과 그 부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께 눈물이 나도록 감사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선생님은 제가 만나 뵌 선생님들 중에 가장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격려 한 마디가 저에게 많은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평생을 잊지 않고 꼭 한 번 뵙기를 소망했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하라 선생님도 그 시절을 떠올리는지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열 살의 조선인 소년과 열아홉의 일본인 여선생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만난 60년 만의 해후는 짧았다.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다. 굳이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마른 손을 부벼주는 손길에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깊은 눈길에 하고 싶은 말들이 이미 다 녹아 있었다. 점령국과 식민지의 가슴 아픈 역사를 초월해 세월의 굽이굽이를 뛰어넘어 가장 순수했던 한 시절의 스승과 제자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라 선생님의 건강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덧붙여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