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병으로 참전하다

한 장의 흑백사진이 있다. 어른도 소년도 아닌 열여덟 살의 나와 아프리카 난민처럼 깡마른 열다섯 살의 동생 정식이 사진 속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1950년 8월, 부산 광복동의 허름한 사진관에서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 어떻게 그런 사진을 찍게 되었을까? 돈 한 푼 없는 피난민 처지에 그 사진을 기념으로 찍어두어야만 했던 형제의 절박한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그날은 정식과 함께 학도의용군 입대를 지원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정식은 나이가 어려서 퇴짜를 맞고 나는 다음 날로 입대가 결정되었다. 총을 들기에는 앳된 나이였지만 전세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형편이라 참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전에 갑종 합격을 신고하고 강제 입대를 한 적이 있었지만, 긍지에 맞지 않아 몰래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 기왕 참전할 바에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당당하게 자원입대를 하고 싶었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젊은이다운 정의감과 혈기가 넘칠 때였다.

그런데도 막상 다음 날로 입대 결정이 나자 마음이 심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두고 온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도 눈앞에 아른거리고, 부둣가에서 막일을 하는 아버지와 며칠째 설사로 고생을 해서 퀭하게 마른 동생을 보는 마음도 편치 않았다.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는 것은 아닐까?

“형, 우리 사진이나 한 장 찍어두자.” 

그날, 정식도 나만큼이나 마음이 심란했던 모양이다. 임시숙소가 있던 광복동까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뒤따라오던 정식이 느닷없는 제안을 했다.

“그래, 기념으로 한 장 찍어두자.” 

무엇을 기념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담담하게 카메라 앞에 섰다.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차마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어서 한 장의 사진으로 간직하고자 했던 정식의 애틋한 마음을 나는 기억한다. 몸도 마음도 여리고 가냘프기만 했던 정식, 그런 동생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때 비장한 각오를 했었다. 걱정 말아라. 아우야 형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역사적인 9.15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였다. 미 7사단 32연대에 배치되어 일본 부사산 산록에서 기초적인 군사훈련만 받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된 곳이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물론 최전방 부대는 아니었다. 미 제1 해병대가 상륙에 성공해서 교두보를 잡아놓은 상태에서 후속 부대로 안전하게 상륙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나 무섭고 떨리는지 쿵쾅쿵쾅, 천지를 뒤흔드는 포탄 소리만큼이나 내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실탄이라고는 겨우 열 세 발밖에 쏘아보지 못했고, 엠원M-1 소총의 개머리판을 땅에 끌고 다닐 정도로 체구도 작은 열여덟 살의 소년이 총탄이 빗발치는 진짜 전쟁터 한복판에 던져졌으니 어떻게 공포에 질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때는 정말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는 동안에 우리 부대는 안양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가족들 소식이 궁금해서 이제나저제나 서울로 입성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내 기대와는 달리 부대는 용인으로 이동을 했다. 거기에서 실전훈련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와 또다시 산악훈련을 받았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함경도로 투입되어 한만 국경까지 점령함으로써 남북전쟁을 끝내는 임무를 수행하게 될 부대였던 것이다.

1주일 후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거슬러 올라 함경북도 이원에 상륙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부대가 한반도 최북단 혜산진을 점령해서 그 기념으로 두만강 물을 떠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승전보가 들려왔다. 한층 고무된 아군은 하루에 이백리 길을 트럭을 타고 내륙으로, 내륙으로 거칠 것 없이 밀고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심상치 않다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중공군이 개입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춥다고 하는 오지 삼수갑산에 도착해 장진호에 진지를 구축했을 때는 이미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이 밀리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고지에서 보초를 서라는 명령을 받고 두 명의 미군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인해전술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을 때라 바짝 긴장되어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20여 명의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그림자같이 우리를 스쳐 아군 진지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적군을 그토록 가까이에서 접해본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 사실을 부대에 알릴 것인가? 

세 명의 병사가 의견이 달라 옥신각신 다투었다. 결국 중공군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한참을 우회해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날이 훤하게 밝아 부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한바탕 전투를 치른 뒤였다. 부상병과 사상병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뒹굴고 있었다. 그 후 우리 부대는 이틀 밤을 중공군과 대치했다. 낮에는 하늘에서 투하되는 군수물자나 보급품을 옮기느라 눈을 붙일 새가 없고, 밤에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공포심을 조장하는 심리전으로 공격해오는 중공군의 침투에 두려움에 떨면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11월 29일, 마침내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앞에 전차 두 대를 세우고 그 뒤에 트럭과 군인들이 따르는 후퇴 길에 올랐는데 우리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적군의 공세가 치열하게 펼쳐졌다. 산 위에서 쏟아지듯 내려오는 적들의 총탄과 포탄 세례에 트럭은 박살이 나버렸고, 전의를 상실한 아군들은 속수무책으로 엄청난 희생자를 내며 후퇴하기에 바빴다. 눈 덮인 비탈에 몸을 은신하고 있던 한미 병사들에게 지휘관이었던 미군 대령이 총을 뽑아 들고 “무브 아웃!’ 돌격을 외쳤다. 용감한 몇 명의 미군들이 빗발치는 총탄 사이로 뛰어가는데 나 역시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학도의용군으로 보이는 전우 한 명이 총에 맞아서 와락 쓰러졌다. 

“살려줘! 살려줘!”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을 쟁쟁 울렸다. 후퇴하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지만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에게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전우애가 솟구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때는 누가 누구를 살린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생과 사가 손바닥 뒤집어지듯 바뀔 수 있는 위급한 순간들이었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그 친구의 피가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다. 팔에서 피가 샘처럼 솟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큰 부상이었다. 지혈을 시켜야겠다는 다급한 마음에 부상 부위의 옷부터 잘라내고 살을 드러내 막 붕대로 감으려고 하던 찰나였다. 내 앞에서 “쾅!” 하는 폭음이 들렸다. 그 소리는 일생동안 들어봤던 소리 중에 가장 큰 굉음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하나님을 불러야 할 텐데 하나님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하고 죄를 많이 지었으면 이 작은 소년의 마지막 소원을 안 들어주실까……, 그리고 나는 까마득히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앞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의식이 돌아왔다. 사방은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확 찔렀다. 머리를 만져보니 철모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폭탄 파편으로 인한 상처로 어깨에서 뭉글뭉글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내가 돌봐주었던 전우는 폭탄에 맞은 것인지 내 옆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았다!’ 

하나님을 애타게 찾았을 때 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고 쾅, 하는 굉음 때문에 순간적으로 귀에 이상이 생겨 내 목소리를 내가 듣지 못한 것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철모를 찾아 쓰고 아군들이 대피하고 있는 길가까지 기다시피 해서 내려왔다. “헬프미! 헬프미!” 소리를 질렀는데 미군들은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그냥 지나치거나 외면했다. 다행히 한국군 전우들 중에서 나를 알아본 학도병들이 있었다. 깜짝 놀라 뛰어온 그들이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해주고 쓰리쿼터 운전석 바깥, 받침대에 매달려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트럭마다 부상병이 어찌나 많은지 몸을 의지할 공간도 없을뿐더러 부상병들조차도 사람에 깔려서 죽을 판국이었다. 하지만 트럭이 출발하고 몇십 분이나 달렸을까. 요란한 총성과 함께 예광탄의 불빛이 밤하늘로 치솟더니 또다시 우리 트럭은 적들의 집중포화 대상이 되고 말았다. 쓰리쿼터 운전수는 총에 맞아 즉사하고, 나는 또다시 세 군데 총상을 입었다. 그 순간의 감각이라는 건 꼭 이런 것이었다. 넓적다리 두 방은 누가 뒤에서 예리한 창으로 푹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고, 발뒤꿈치의 한 방은 무거운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는 언덕 한쪽에 처박혀 버렸다. 다행히 내가 있는 위치로는 더 이상 총탄의 포화가 미치지 않았다. 길 건너편으로 낭떠러지를 거쳐 얼어붙은 장진호수가 이어져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굴리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만을 이용한 절름발이 포복이었다. 얼마 동안은 나를 겨냥해 퍼붓는 포화의 흔적이 눈 위를 수놓았다. 총성과 총탄의 흔적이 멀어지자 더 이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위험이 사라지자,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차가운 얼음바닥 위에 앉아서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면서 미군들이 지나갈 때마다 도와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다들 고개만 젓고 지나갈 뿐, 나를 떠메고 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둠이 깊어가면서 추위와 바람은 더욱 매서워졌다. 나를 구원해줄 생명의 은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얼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이대로 버리지 마옵소서. 나를 살리소서! 나는 살아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야 합니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때였다. 미군 두 명이 내 몰골을 보고는 포기하고 그냥 지나갔는데 무슨 생각인지 다시 되돌아왔다. 그중의 한 명이 나를 부축해 업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천사의 출현이었다. 어찌나 고마웠던지 그의 등에 업힐 때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지만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 넓은 장진호수를 미군의 등에 업혀서 간신히 빠져나오자 반가운 불빛이 보였다. 미군들은 민가를 찾아 허기진 배부터 채운 다음 나를 통역 삼아 집 주인 할머니에게 아군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그제야 미군들이 짐이 되는 줄 알면서도 왜 나를 데리고 왔는지 짐작이 갔다. 위험지역을 빠져나가려면 통역 겸 길 안내자로 한국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겨우 길만 가르쳐준 뒤 정신을 잃고 말았다. 새벽녘에 나를 깨우는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젊은이! 빨리 일어나서 도망가. 지금 집 뒤쪽으로 중공군들이 몰려오고 있어.”

나를 데려다주었던 미군들은 이미 떠나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또다시 죽을힘을 다해 그 집을 빠져나와 도망을 쳐야 했다. 아군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구르듯 기어가는데 살아 있다는 자체가 끔찍한 고통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 걸레같이 찢겨진 온몸의 상처들, 언제 어디에서 중공군이 나타나 총탄을 퍼부을지 모르는 적군의 점령지 한가운데서 아군을 찾아 헤매야 하는 나의 처지는 절망스럽기만 했다. 어디를 봐도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삶과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모든 감각이 무뎌지고 그저 누군가의 힘에 의해 내가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후퇴하는 아군병사들을 구조하기 위해 제1 해병대 대원들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살았구나……!’

병사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것을 보며 나는 또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임시야전 비행장의 천막 안이었다. 천막촌 안의 많은 부상병 중 내가 제일 어려 보이고 또 상태가 가장 심각하다고 판단했는지 즉시 청진까지 비행기로 후송해주었다. 거기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일본 후쿠오카의 미 육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필요한 응급 치료를 모두 받은 후 동경에 있는 미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서 한 달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가던 어느 날, 미군 의사 한 분이 찾아왔다.

“미스터 김, 넌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 부상을 입고 살아났다는 건 기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의 부상은 파편이 불과 몇 밀리만 안쪽으로 스쳤다면 그 자리에서 절명할 수도 있었을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다. 오른쪽 다리도 세 군데나 부상을 입었지만 운 좋게도 힘줄이나 신경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어깨 부상만큼은 심각해서 아직까지도 왼팔을 들어 올리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만, 의사의 말처럼 살아난 것이 기적일 정도의 부상을 당했는데 그 정도의 후유증만 남았다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릴 일이다. 

“미스터 김, 난 네가 원한다면 일본이든 미국이든 더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수 있다. 어떠냐? 일본이나 미국에서 공부할 마음이 없는가?”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 “No” 하고 말았다.

“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랬다. 죽음이 엄습하는 공포 속에서도 나를 이겨낼 수 있게 해준 힘은 가족이었다. 나는 한 순간도 가족을 잊은 적이 없었다. 11월 29일, 부상당했던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셋째, 정완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1월 3일, 부산으로 귀국해 1월 5일, 극적으로 가족과 상봉했는데 그 날짜 역시 잊을 수 없는 것은 둘째 동생, 정식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친절과 호의는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 어떤 미래가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면 나는 사절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월 5일, 부산 초량동에서 가족과 만나게 된 것 또한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그날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나는 목발을 짚고 친구의 부축을 받으면서 초량으로 향했다. 가족들이 피난을 내려왔다면 중국대사관이 있는 초량에 살고 있을 텐데 하는 막연한 추측으로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초량 거리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무도 귀에 익은 반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형!”

뽀얀 안개를 뚫고 달려온 사람은 놀랍게도 정식이었다. 때마침 중국대사관 앞에 나와 있던 정식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달려 나온 것이었다. 내 추측대로 아버지는 중국대사관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셨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1·4후퇴로 모두 부산에 내려와 함께 살고 있었다.

“꿈이 너무나 흉측해서 난 널 꼭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하나님께 너를 살려달라고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날 밤,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는데 목이 왈칵 메여 왔다.

놀랍게도 어머니가 나쁜 꿈을 꾸신 날과 내가 부상을 당했던 날이 일치했다. 이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자식과 연결되어 있는 보이지 않은 끈을 통해 나를 느끼고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신 어머니. 내가 초인적인 힘으로 그 모든 고통과 위기의 순간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나는 그날 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깊고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를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시공을 초월한 어머니의 기도와 나에게 두 번째 인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