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아빠, 부자 아이들

월남한 이후로 아버지는 중국 대사의 차를 모는 기사 일 외에는 변변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으셨다. 몇 가지 사업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하나 같이 돈이 될만한 일들은 아니었고 사업적 수완 또한 없으셨다. 발명가적 기질만 다분하셔서 밤낮 무엇을 연구한다고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들여 어머니를 고생시켰는데, 언젠가는 수백 마리나 되는 몰모트를 사육했다가 아무도 사주지 않으니까 무상으로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일도 있었다. 내가 돈을 벌게 된 이후로는 아버지의 연구에 필요한 재료-이를테면 대형 자석 같은 것-를 외국까지 나가서 구해다 드리곤 했지만, 아버지의 관심 분야는 늘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결코 정력과 돈을 투자하지 않을, 돈이 될 가망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일에만 과학자적 탐구열을 불태우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족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 평등주의자에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신 분이었다. 가장이라는 권위는 내세워 본 적이 없고, 아내와 자식들의 의견을 늘 존중하고 귀담아들어 주셨다. 가족을 화목하게 이끌어가려는 나름의 위트와 유머가 있으셨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절대 하는 법이 없으셨다. 한 마디로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했는데 단 한 가지 못하신 일이란 돈을 벌어오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 외에 너무 순수한, 너무 많은 인간적 매력을 갖고 계셨던 분이셨다. 무엇보다 가정의 화목, 그 중심을 늘 항심으로 지켜주셨다. 그것이 나와 내 형제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어머니 역시 경제 관념이 투철하지 못하셨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새벽이고 밤이고 기도에 매달리시던 모습이다. 형편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이웃에게 쌀 한 톨이라도 나눠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던 모습,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늘 참고 양보하고 혼자 속상해하시던 모습 같은 것들이다. 용돈이 조금만 생겨도 교회나 구제사업 하는데 갖다 바치고 당신은 늘 빈손이셨던 분. 요즘 젊은 주부들처럼 저축이나 재테크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따위의 일은 어머니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적 여유 없이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시집간 누이를 빼고 사내 형제만 다섯이었지만 가정은 늘 화목하고 웃음이 넘쳤다. 오히려 부모님의 희박한 경제 관념은 나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빨리 독립시켜주었다. 군대를 제대한 후로 몇십년 동안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일로부터 놓여나지 못했지만, 그것은 결코 무겁거나 괴롭기만 한 짐은 아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전쟁터에서의 경험은 확실히 인생을 바라보는 나의 눈을 성숙시켜주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것,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덤이었다. 나에게 ‘제2의 인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열아홉 살의 나는 많이 묵직해져 있었다. 가난한 아버지, 어머니의 짐을 나누어져도 여유 있게 웃을 수 있을 만큼 어느새 어깨가 탄탄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1951년 3월, 군대를 제대한 나는 목발을 짚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회복되자마자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취직을 했다. 낮에는 숙소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더플백 한가득 미군들이 벗어놓은 세탁물을 짊어지고 끙끙대며 초량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세탁물을 빨고, 풀칠하고, 다림질하고 차곡차곡 개키는 일은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했다. 그 일은 꽤 짭짤한 가계의 수입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하우스보이로 지낼 수만은 없었다. 대학에 가려면 더 늦기 전에 복학을 해야 했다. 송도해수욕장 조금 못미처 천마산에 대광고등학교의 천막 분교가 있었다. 대학 입시를 겨우 몇 달 남겨놓고서야 나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시간을 밤으로 돌리고 3학년으로 복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강행군을 하면서 입시 준비를 했지만, 솔직히 시험에 합격할 자신은 없었다. 전전긍긍하는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의대를, 어머니는 신학대에 가기를 바라고 계셨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건축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버지도 의대에 다니셨고, 작은아버지도 의사이셨지만 평생 아픈 환자를 돌보며 사는 일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목사도 훌륭한 직분이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건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의 없을 때였다. 건축과가 무엇을 배우는 곳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대련에서 보고 느꼈던 도시와 건축물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와 건축물을 만드는 일이라면 평생 행복하게, 즐겁게 일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입시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나는 집에는 알리지도 않고 혼자 몰래 결과를 보러 갔다. 그만큼 합격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잔뜩 긴장된 발걸음으로 발표장에 들어섰는데, 결과는 놀랍게도 합격이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수험번호가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순간 어찌나 고맙고 감사하던지 정말 눈물이 다 핑, 돌 지경이었다. 

자꾸만 웃음이 터지고 가슴이 뛰는 걸 겨우 진정시키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부모님은 안 계시고 방에는 동생들뿐이었다.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나 떨어졌어.”라고 했다.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정식이 뭐라고 할 말이 없는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곧장 골목 안 구멍가게로 갔다. 동생들이 좋아할 사탕이며 과자를 한 아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방문을 열어젖히며, “내가 어디 떨어질 사람이냐?” 하고 씨익 웃어주었다.

감쪽같이 속은 정식이 그제야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형제가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그날 저녁, 피난민촌 하꼬방에는 모처럼 잔치가 벌어졌다. 큰아들이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재들만 들어가는 옛날 경성대학교에 들어갔다고 아버지, 어머니의 입가에도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미군부대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몸은 고달팠지만 대학생이 되었다는 자부심, 건축에 대해 조금씩조금씩 알아나가는 재미에 하루하루가 새롭고 보람찼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이라 구색을 갖춰 공부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미군부대에서 구해온 두꺼운 합판을 잘라 그 위에 두꺼운 종이를 깔고 압정을 꽂은 것이 내 제도판이었다. 티자, 삼각자도 직접 다 대패질을 해서 만들어 썼다. 숙제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새벽뿐이었다. 세상이 모두 잠든 새벽까지 스케치를 하고 책을 읽고 또다시 시작될 하루의 계획을 짜느라 판잣집 단칸방의 불은 밤새도록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런 생활은 9.28 수복이 되어 학교가 서울로 환도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친구의 소개로 가회동 부잣집에 입주 과외교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 집 막내아들을 가르치면서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생활비, 숙식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으니 대단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자기 진로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고 자기 생활 또한 알아서 개척해나가는 자립정신은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가 공부하라고 닦달하거나 어디로 가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하고 또 알아서 자기 갈 길을 정하는 것은 우리 형제의 전통처럼 이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상경해 이 친구 저 친구 집을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서울대 전기과에 들어간 정식이나, 연세대 의대에 무시험으로 입학한 셋째 정완이나,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넷째 정용이나, 서울대 미대에 들어간 막내 정헌까지도 그랬다. 누구의 의사도 개입되지 않은 자기 노력과 판단으로 제 갈 길을 정했고, 가족들이 해준 일이란 그 결정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지지해주는 것뿐이었다.

특히 넷째 정용은 어린 시절부터 자립심이나 리더쉽 면에서 걸출한 구석이 있던 동생이었다. 부산 초량 시절, 아버지께서 타이어를 신발장으로 쓸 수 있도록 갈라서 파는 장사를 시작하셨는데-물론 그 일도 돈이 되지는 못했다-, 폐타이어를 구해오는 일이 큰 고민거리였다. 그때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정용이 폐타이어를 가장 빨리, 가장 많이 구해오는 친구에게 상을 주는 방식으로 코흘리개들을 경합시켜서 아버지의 고민거리를 단번에 해결해주었다. 국제시장에서 헌 권투 글러브를 구해다가 동네 애들한테 ‘권투는 이렇게 하는 거야’, 시범을 보이기도 하고 권투 시합을 시키기도 하는 등 아무튼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골목대장이었다. 그런 외향적인 기질과 타고난 리더쉽이 훗날 6.3항쟁의 주동자로 3개월간의 옥고도 치르게 하고, 국가를 위해 제 한 몸 헌신하는 공직자의 길을 걷도록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정용에게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 서도 절대 기가 꺾이는 법 없이 현실을 낙관적으로 뚫고 헤쳐나가는 불가사의한 힘이 넘쳤다.

우리 형제들은 가난한 환경에서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지만, 마음만은 알곡이 꽉 들어찬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주어진 현실에 불평하지 않고 제 갈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힘,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강인함은 물질적인 뒷받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더라도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성실한 삶의 태도, 정신적인 가치에서 대물림되는 것이 아닐까. 자식들에게 무엇을 물려주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부자 신화’가 절대 가치가 되어버린 요즘 시대에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