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의사당과 장발의 사내

피난 수도 부산시 가교사에서 시작되었던 나의 대학 생활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꽤 오랫동안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교사가 정비되지 않아 1953년 가을 학기는 성동역 근처 서울대 사대부속고등학교에서, 이듬해 봄 학기에야 원래 공대가 있던 신공덕동 교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엔 교재도 없고, 실습 도구도 갖춰져 있지 않고, 교수님들도 실제적으로 가르칠 내용이 빈약했던, 참으로 열악한 교육 환경이었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배움에 대한 열정은 더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공부벌레 공대생이었다. 부산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면 게으름을 부릴 수가 없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실력을 쌓는 것만이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 완전히 몰입했다. 또 쉴 때는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마음의 여유도 잃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사람들을 만나고, 운동을 하고, 자연을 감상하고……. 별것도 아닌, 그런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불평할 일도 없어진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고, 나름의 문화를 누리고 있고, 꿈이 있고, 젊음이 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이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으로 누구보다 건실하고 알차게 대학 생활을 꾸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여름방학은 특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해 여름방학, 동기생들은 모두 바캉스를 즐기러 대천 해수욕장으로 떠났다. 나와 신국범 씨, 이신옥 씨만 가지 못했다. ‘서울시 의사당 현상설계’라는, 당시로써는 흔치 않았던 설계 경기에 셋이 힘을 합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화신백화점 옆 안국동에 조그만 가게 하나를 빌렸다. 유리창이 서향이었는데 오후만 되면 살인적인 8월의 햇살이 공간 구석구석까지 비춰들곤 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셔츠가 젖어버리는 좁은 공간에서 세 사람이-여성인 이신옥 씨는 오죽했겠는가- 함께 작업한다는 것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대천에서 발가벗고 물장구를 치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부럽기도 했지만, 남들은 놀 때 땀 흘리며 창작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과 대견함이 찜통더위를 이기게 해주었다. 

학생 작품인 만큼 우리는 실험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도입하려고 애썼다. 뉴욕의 레버하우스에서 ‘타워 앤 포디움’을, 파리의 마르세유 아파트 건축에서 ‘필로티’를, 이태리 말로 페티오라고 하는 중정의 개념을 도입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계안을 만들었다. 지금 보면 디자인도 미숙하고 아이디어도 대단하다고 할 것이 없지만, 당시로써는 그 정도도 꽤 참신한 안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였던 이광노 선배의 작품이 1등으로 당선이 되었는데, 우리 작품이 2등으로 뽑히는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바캉스까지 포기하고 더위와 싸운 보상은 충분히 받은 셈이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화 한 가지가 있다. 다름 아닌, 투시도 한 장을 그리고 서울시 의사당 현상설계의 팀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대학 동창 이상순 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즈음이었다. 대천에서 바캉스를 즐기고 돌아온 이상순 씨가 작업실로 놀러 왔다.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을 터인데, 마침 투시도를 그리려고 하던 참이었다. 스케치 실력이 뛰어난 이상순 씨가 투시도를 직접 그려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라고 했는데, 개성이 분명한 이상순 씨답게 투시도를 아주 걸작으로 그려왔다. 당시에는 투시도에 인물이 들어가는 것도 흔치 않을 때였는데, 의사당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투시도에 멋있게 그려 넣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남자가 ‘장발’의 사내였다는 점이다.

장발이라니!

우리는 입이 딱 벌어졌다. 1955년 여름이었다. 거리에서 장발의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여유’와 ‘낭만’이 흘러넘치는 장발의 신사가 의사당을 향해 걸어가는 그림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강한 메타포가 있었다. 마치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하게 될 서구화의 한 단면을 예견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 그림 한 장으로 이상순 씨가 우리 팀원으로 합류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훗날, 이상순 씨는 또 한 번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한 번은 선망해보았을 건축학과의 홍일점, 이신옥 씨와 결혼 발표를 한 것이다. 둘이 짝 지워지리라는 뉘앙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가 되었다’고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해 여름방학, 이상순 씨가 안국동 가게에 지나가다 들린 것처럼 찾아온 것도 그저 우연한 발걸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순 씨와 이신옥 씨. 처음이자 유일한 캠퍼스 커플의 탄생인 셈이었는데, 두 분 모두 재능과 개성을 겸비한 건축인 부부로 지금까지도 동문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행복하고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2등이긴 하지만 현상설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첫 작품인, ‘서울시 의사당’ 투시도를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삐죽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상순 씨의 얼굴과 장발의 사내가 묘하게 겹쳐지면서 그 어디에선가 싹텄을 수줍은 로맨스의 떨림이 전해져올 것만 같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석양만큼이나 붉게 타올랐던 우리들의 순수하고 뜨거웠던 창작 열기, 풋풋했던 젊음의 끝자락이 진한 그리움으로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