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기보다 위대한 지휘자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고 했던가, 성공을 거둔 사람 뒤에는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 훌륭한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생활의 첫발을 ‘종합건축연구소’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점에서 내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이천승 선생님과 김정수 선생님이 이끄셨던 ‘종합건축’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축사무소였다. 두 분 모두 실력을 인정받던 건축가로 건축의 불모지였던 한국 건축계에 선구자적 업적을 남기며 후진 양성에 많은 노력을 쏟으신 분들이다.

이천승 선생님은 나와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다. 중국 대련 시절,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던 대련역사를 설계하신 분이 다름 아닌 이천승 선생님이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당시 만주 철도청에 근무하고 계셨고, 선생님이 디자인한 건물을 보며 소년이었던 나는 건축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스승과 제자로 만나 한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은 참으로 오묘한 인연이다.

김정수 선생님은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서울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셨다. 나와 같은 평양 출신으로 스승이라기보다는 형님같이 자상하고 친근한 분이셨다. 선생님은 교환교수로 미네소타 대학에 계시는 동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유기적 건축’에 심취하셨다. 그 영향으로 강의실에서도, 건축사무소에서도 건축의 기능에 대해 늘 강조하셨다. 형태나 공간의 중요성 못지않게 건축의 콘텐츠로 남게 되는 기능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해결하느냐에 따라 건축의 작품성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유도를 하셔서 체격도 좋으시고 성격도 호탕하신 편인데 작업에 임할 때만큼은 냉정하리만큼 엄격하고 정확하신 분이었다. 당장 다음 날 프레젠테이션에 써야 할 투시도를 페인트 브러시로 지워버린 사건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날, 선생님은 학교 강의를 마치시고 밤늦게야 사무실로 돌아오셨다. 한 동료가 다음 날 프레젠테이션에 쓸 투시도를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우리가 보기에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는데, 선생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서 바케츠에 물 좀 떠와라.” 

의아해하면서도 바케츠에 물을 받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넓적한 페인트 브러시에 물을 묻히더니 기껏 공들여 그려놓은 투시도를 물로 단숨에 박박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수채화로 그려진 투시도가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지면서 그림의 개체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투시도를 그렸던 동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은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들의 눈도 왕방울만큼 커졌다. 당장 내일 아침에 건축주에게 보여주어야 할 투시도인데 어쩌려고 저러시는 것일까.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붓으로 쓱쓱 터치를 해서 투시도를 다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당신의 생각과 느낌대로 붓을 놀려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그 빠르고 정확한 솜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설계안이라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투시도는 천의 표정을 갖는다. 프레젠테이션에서 투시도가 중요한 것은 비전문가인 건축주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느낌에 대한 확신,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는 시간에 구애됨 없이 터치에서 이미지까지 전체를 수정해서 완전히 다른 느낌의 투시도를 완성해내는 그 자신감과 대담함에 나는 압도당해버렸다. 우리 같으면 공들인 노력이 아깝고 시간 안에 해낼 자신이 없으니까 오물쪼물 수정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원형을 살리려고 했을 텐데.

작가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건축가에게는 범인들의 접근할 수 없는 위대한 일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날 선생님은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란 어떤 자세로 작업에 임하면서 자기 세계를 관철시켜야 하는지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렇게 완성된 투시도를 가지고 다음 날 건축주를 훌륭하게 설득해내셨음은 물론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위대한 작가, 김정수 선생님. 그런 분 밑에서 건축적 수련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까지도 큰 행운으로, 긍지와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내가 ‘종합건축’에서 일했던 1950년 후반은 세계 1차 대전 전후 서구에서 일기 시작한 합리주의 건축 사조가 급속하게 유입되던 시기였다. 국제적 합리주의 건축 사상의 기수가 되었던 르꼬르뷔지에,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현대 건축의 선구자 월트 그로피우스, ‘유기적 건축’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까지. 그들을 논하지 않고서는 건축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 세계적 거장들이 우리나라 건축가 1세대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건축가가 되지 않고 화가가 되었더라면 피카소에 버금가는 세기적 화가가 될 수 있었을 르 코르뷔지에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정의한 그의 유명한 아포리즘과 철근 콘크리트 재료의 사용, 기능주의와 대담한 표현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던 그의 건축 언어는 늘 내 작품 창작의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주곤 했다.

바우하우스나 하버드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던 월터 그로피우스의 건축철학과 교육내용에도 나는 깊은 공감을 느꼈다. 기계에 의해 성립되는 근대 산업을 인정하고 산업과 예술의 통합을 실현하고자 한 그의 모든 노력과 활동은 현대 건축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건축과 디자인, 커뮤니티 계획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산업혁명을 가르쳐준 최초의 사람’이었고, ‘공업사회의 위대한 가능성을 연구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요구에 동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했던’ 위대한 교육자이자, 건축가였다. 

정림건축이 창립 초창기부터 꾸준히 강조해온 행동강령들 즉, 건축을 통한 사회의 선도, 토털 아키텍처의 추구, 팀워크의 강조 등은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나 하버드에서 주장했던 교육내용들에 영향받은 것들이다. 김정수 선생님 또한 그런 합리주의적 경향을 ‘종합건축’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하셨다. ‘종합건축’의 설계안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팀워크에 의해 생산되었다. 보다 완벽한 안을 만들기 위해 토론하고, 비판하고, 의견을 내서 작품을 만드는 팀 어푸로치 훈련은 종합건축 시절부터 몸에 익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세계 건축사를 새롭게 쓴 거장들을 나는 여전히 경외한다. 르 코르뷔지에와 월터 그로피우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미소 반델로에, 존경하는 스승 김정수 선생님까지.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그런 거장이 되기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난 건축가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거장의 출현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건축의 흐름은 가속화되는 산업화와 함께 대형화, 복합화로 갈 수 밖에 없는 추세 속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집이나 소규모 연구소에 틀어박혀 장인정신에 의존해 작품을 만들어내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건축 시장이 활성화되기까지는 그로부터 십여 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지만, 종합건축 시절부터 그 흐름은 어렴풋하게 감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급속하게 변화될 앞으로의 건축 환경에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지 않는 건축가 집단은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곧 오리라는 것을.

수만 평에 이르는 복합빌딩, 콤플렉스 같은 프로젝트들은 한 사람의 뛰어난 영감과 천부적 재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건축에 관련된 수많은 전문가들의 아이디어와 역량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완성되었을 때 가장 좋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탄생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건축가의 역할이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것이다. 각각의 특색을 갖고 있는 수많은 악기들이 하모니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지휘자의 역량이듯 건축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건축주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가장 아름답고 합리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 건축가의 일이라 했을 때, 그 요구를 최상의 종합작품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팀워크와 협업을 조화시키고 진두지휘하는 것이 건축가의 능력을 가늠하는 잣대인 것이다.

불후의 명작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다. 거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비록 거장을 꿈꾸지 않게 되었지만 조금의 서운함도 불평도 없다. 나는 질 높은 건축을 하겠다는 이상과 의지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고, 내 이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축주와 사회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거장들을 동경하고 흠모하면서 내가 진실로 부러워했던 것은 딱 한 가지이다. 그들은 좋은 건축주를 만난 행복한 건축가들이었다, 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 건축을 문화로 받아들여 건축가들이 보람있게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보고 뒷받침해줄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