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보다 강한, 꽃

여성을 꽃에 비유한다면 페미니스트들은 질색을 하겠지만 나는 여성에 대해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신화를 갖고 있다. 여성은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꽃과 같은 존재이고, 나는 그 꽃을 다치지 않도록 보살펴주고 사랑해줄 의무가 있다고 믿는, 다분히 가부장적이고 기사도적인 여성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시절, 고등학교 친구 문탁진 박사로부터 아내를 소개받았을 때도 그랬다.

아내는 단아한 꽃 같았다. 그저 예쁘고 연약해 보이는 꽃이 아니라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지적 매력을 머금고 있는 꽃.

아닌 게 아니라 수도사대 국문학과 출신에 을유문화사라는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던 여성답게 아내는 어휘 하나를 선택해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문학적 감수성이 묻어나는 동시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특히 웃을 때 미소가 매력적이었는데, 연약해 보이면서도 강단이 느껴지는 그 당당한 미소에 나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아내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장남은 절대사절이라는 남편감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완강하게 거부하던 조건을 허물어뜨린 것은 다름 아닌, 내 음성이었다고 한다. 첫 만남 하루 후, 전화로 애프터 신청을 했는데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굵직굵직한 내 목소리가 무척 자상하고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걸 두고 천생연분이라고 하는 것일까. 나는 아내의 미소에, 아내는 나의 음성에 반한 순간, 객관적인 조건이라는 것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의미도 없게 되어버렸다.

“나와 결혼하게 되면 십년은 고생할 각오를 해야 돼요. 그 다음엔 정말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지만. 그럴 수 있겠어요?”

“예……”

“언젠가 당신을 위해 집을 짓겠어요. 언덕 위에 하얀 집. 집안 가득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도 달고, 테라스도 있는……”

“전 언덕 위에 하얀 집보다는 마당 있는 집이 좋아요. 한옥에 예쁜 대청마루도 들여놓고, 마당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먼 훗날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구상하느라 행복했던 연애시절이었다. 그때 아내는 십 년은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 고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자상하게 배려해줄 것 같은 좋은 음성’을 가진 나를 믿었기에 주저 없이 예, 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스물다섯의 아내가 집 한 칸 없는 스물여덟의 장남인 나에게, 모셔야 할 시부모와 돌보아야 할 시동생이 넷이나 있는 김씨 집안으로 겁 없이 시집오게 된 사연이다.

1959년 11월 14일. 첫눈이 내리던 날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온양 온천에서 2박 3일 동안 꿈같이 달콤한 허니문도 즐겼다. 그때까지는 나도 아내도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다. 결혼을 했다는 것의 의미,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는 특히 더 그랬을 것이다. 십 년만 고생하고 나면 건축가 남편이 직접 설계해서 지어줄 그림같이 예쁜 집, 그 집을 어떻게 꾸밀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만 빠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아내를 꽃처럼, 예쁜 모습 그대로 우리 집에 꽂아두고만 싶었다. 생활에 찌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귀가하는 나에게 아내가 하루 종일 화병 속의 꽃처럼 안온한지, 강둑의 들풀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도 최선을 다해 바깥일을 하고 있으니 집안일은 어떻게든 알아서 꾸려나가겠지. 언젠가는 웃으며 살날이 오도록 만들어 줄 테니 제발 소소한 불평일랑은 말아주시오, 라는 식이었다.

“처음엔 진짜 이해가 안됐어요. 경제 관념이 철저하던 친정집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으니까. 어머님은 눈만 뜨면 교회에 나가셔서 저녁이나 되어야 들어오시지, 아버님은 하루종일 집안에 계시지, 도련님들은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지, 집안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고 모르는 거예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체계와 질서가 없는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이 너무도 화목하게 잘 지낸다는 거였어요.”

시집 와서 느꼈던 낯설음과 충격을 훗날, 아내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각자 할 일은 알아서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내버려두는, 악착같은 근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우리 집안 사람들의 천성이 똑 부러지는 성격의 아내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체계와 질서가 없는’ 집안의 체계와 질서를 잡아나가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사람은 아내였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떠다민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 또한 아내의 천성이었다. 

아내는 가장 먼저 쌀과 연탄을 넉넉하게 쌓아두는 일에서부터 집안 살림의 규모를 잡아나갔다. 김치 담글 줄도 모르고 시집 왔던 아내가 몇십 포기씩 되는 김장을 해내고, 하루가 멀다 하고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덩치 큰 사내들의 옷을 빨아내고, 집안 구석구석을 윤이 반짝반짝 나도록 쓸고 닦고 훔치고……. 그렇게 허리 한 번 펼 사이 없이 일하느라 가뜩이나 호리호리하던 몸매가 쇠꼬챙이처럼 말라가면서도 아내는 무슨 사명감에라도 불탄 사람처럼 집안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나는 감지덕지하게도, 아내의 부드러운 안마를 받으며 아침잠에서 깨어났고, 밤늦도록 옆에 앉아 사각사각 깎아주는 연필로 스케치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물론 아주 드물게 눈물을 짓는 일도 있었다. 내가 자기 마음을 몰라줄 때였다. 한 마디 말로 다독여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걸 해주지 못했다. 아내가 그렇게도 반했던 ‘자상하고 귀에 듣기 좋은 음성’을 가진 내가 말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세상 살 의욕을 다 잃은 사람처럼 서러워하며 글썽글썽 굵은 눈물방울을 매달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쉽고 간단한 걸 못해주었을까 싶다. 그때는 아내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었던 것 같다. 아내가 좀 더 이해해 주기를, 좀 더 참아주기를, 웃으면서 시작했으니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마무리해주기를 침묵으로 요구하고 종용할 뿐이었다. 

신혼 때였다. 어느 날, 나는 소파를 사들였다. 후암동 주택가, 방 두 칸에 세 들어 사는 처지에 소파를 들여놓을 공간도 솔직히 없었다. 소파가 집에 들어오던 날, 기가 찬다는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던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새 소파가 생겨서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좋기만 했다. 

내 안에는 문화적이고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을 향한 끝없는 욕구가 있다. 가회동 가정교사 시절, 사례비를 받자마자 제니스 전축부터 사들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돈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소파에 기대어 좋은 음악을 감상하며 차 한 잔 즐길 수 있는 정신적 여유.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릴랙스 시킬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욕구는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전축까지 새로 사들이게 만들었다.

“경제에 관한 한, 당신은 우선순위가 없는 사람이에요.”

아내는 딱 그 한 마디만 하고 말았다. 시동생들 도시락 반찬에 넣을 달걀 한 꾸러미가 당장 아쉬운 아내에게 소파니, 전축이니 하는 것들은 가당치 않은 허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문화적 취향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불평은 하지 않았다.

1960년에 허니문 베이비, 형국이가 태어났다. 경제에 관한 우선순위가 분명한 아내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어느 날 아내가 집을 옮기겠다고 나섰다. 사실 후암동 집은 전셋집도 아니었다. 꼬박꼬박 월세를 물어야 하는 월셋집이었다.

“한국은행에 다니는 사람 중에 월셋집에 사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것 역시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였다. 솔직히 내가 받는 월급이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각종 명목을 붙여서 수시로 지급되는 보너스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나는 목돈을 만들기 위해 안질이 걸릴 정도로 하루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동생들 셋의 등록금부터 챙겨놓고 나면 생활은 항상 쪼들리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월셋집은 안돼요. 보증금에 돈을 조금만 더 보태면 싼 동네에 전셋집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아내는 큰소리를 탕탕 쳤다.

그 무렵 나는 이사가는 집이 어디인지, 이삿짐을 어떻게 옮기는지 신경도 쓸 수 없을 만큼 바빴다. 모두 다 아내가 알아서 했다. 상도동에 집을 구한 것도 서고를 가득 채운 내 책들과 해묵은 살림살이들을 다 싸서 옮기고 풀고 정리하는 것도 전적으로 아내의 일이었다. 동생들이 도와주느라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만 나중에 전해 들었다. 

어느덧 생활 전선의 억척스러운 주부로 변해버린 아내.

아내의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자에 대한 내 오랜 고정관념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연약하고 야리야리해서 남자의 손길이 안 가면 안 되는 꽃과 같은 여자는 더 이상 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 보호의 손길이 가 닿기도 전에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척척 다 해버리는 아내. 생활의 중심을 꽉 틀어쥐고 전투욕에 불탄 병사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내를 보면 아내를 화병의 꽃처럼 꽂아두고만 싶었던 나의 바람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상도동 집을 아예 사버렸다. 그 집에서 장녀 소영이와 막내 은영이가 태어나고,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 듯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건강하셨고, 동생들은 좋은 대학에 붙어주었고, 아이들도 여름날 화초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부자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더 이상 궁색하지도 않은 소박하면서도 화목한 가정,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그런 가정의 중심에 경제 관념이 분명한 아내가 버티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퇴근하기 전에 아내를 살짝 불러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서 아내와 오붓하게 식사도 하고 산책도 즐기고 싶은 그런 저녁이었다. 아내는 ‘입고 나갈 옷도 없는데…….’ 투덜거리면서도 곱게 단장을 하고 나와 주었다.

“내가 시집와서 정말로 힘들었을 때 무슨 힘으로 버틴 줄 아세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물었다.

“?……”

“신혼 초였나, 새벽에 잠을 깬 당신이 말했어요. 나는 다시 태어나도 건축가가 되겠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좋다고.”

“내가 그랬어?” 

“그때 당신이 새롭게 보였어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잠재력!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도 후회는 안하겠구나, 현실을 헤쳐나갈 힘이 솟더라고요.” 

그 고백이 내 어깨를 얼마나 으쓱하게 해주었는지 아내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귀에 듣기 좋은 음성이 아니라,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아내는 그렇게도 쉽게 나를 용기백배하게 만들어주는데, 나는 왜 아내에 대한 칭찬이나 위로에 그토록 인색했을까.

“앞으론 불쑥불쑥 불러내고 그러지 마세요. 그 레스토랑 밥값이면 반찬을 몇 가지나 더 만들 수 있는 줄 알기나 하세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아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를 매혹했던 그 미소는 예전 그대로인데 너무도 씩씩하게 변해버린 아내를 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곱고 탐스럽던 꽃이 내게 시집을 와 너무 많은 고생을 한 탓에 시들어버린 것은 아닐는지.

젊을 때의 아름다움과 매력이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사그라드는 것이 자연의 정한 이치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소리없이 스며드는 고마운 것들도 있다. 함께 한 세월만큼 깊어지는 서로에 대한 이해, 자신의 모난 부분이 깎여나가고, 성숙해져가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 그리고 그런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이 들어가는 부부의 크나큰 축복이다.아내가 수고하며 집안을 이끌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나는 나이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더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아내는 나에게 여전히 꽃과 같은 존재이다. 아름다움과 향기를 전해주던 젊은 날의 꽃을 넘어 씨앗을 잉태하고 열매를 만들어내는 생명력 있는 꽃으로 언제나 내 옆에, 그리고 우리 가족의 중심에 든든히 뿌리내리고 있는 아내는 진정 나무보다 강한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