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카사블랑카

30여 년을 살았던 동교동의 주택을 팔고, 잠실의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를 온 지도 5년이 다 되어간다. 도시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최신 트랜드형 주택에 살아보니 편리하기는 하다. 현관문만 잠그면 외부와는 완전하게 단절되니 무엇보다 안전하다.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가면 은행이니 병원이니 식당이니 웬만한 편의시설을 다 이용할 수 있어 건물 바깥으로 나갈 일도 별로 없다. 19층에서 내려다보는 한강과 도심의 전망도 멋있고, 주택처럼 관리해야 할 집안일이라는 것도 없으니 우리처럼 나이 든 부부가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하고 만족스러운 주거 형태이다.

그런데 얼마 전이었다. 큰딸 소영이가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다녀오면서 동교동 집이 화제로 떠올랐다. 동창들을 찾아주는 한 인터넷 사이트 덕분에 딸 아이도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하나같이 물어보는 것이 동교동 ‘그 집이 아직도 있느냐’는 궁금증이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어요. 친구들이 나에 대해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게 우리 집이더라고요. 내 생일엔가 한 번 와봤다는데 그 집이 잊혀지지 않는대요. 그렇게 아름다운 집은 처음 봤대요. 우리야 늘 살던 집이니까 좋고 추억도 많지만, 남들한테 그렇게까지 강한 인상을 준 집이었던가…. 새삼 자랑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어요.” 

딸아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아내가 또 한바탕 동교동 집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냈다.

“참 재미있는 집이었어. 그렇게 오래 살아도 싫증이 안 나고, 사방에서 빛이 다 들어오고, 사시사철 꽃동산이 되는 그 예쁜 정원하며, 정원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내 손길이 안 간 곳이 없었는데……. 건축가 부인으로서의 혜택을 맘껏 누려본 집이라고나 할까? 작품으로 남겨두었어도 좋았을 집인데 너무 아쉬워요.” 

나는 모녀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만 있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세월이 흐르도록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집 한 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집이 누구의 소유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집에 얽힌 30여 년간의 무궁무진한 역사와 추억은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온전한 우리 가족만의 소유가 아닌가. 어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아름답게 추억되는 집 한 채를 가족들에게 마련해주었다는 것. 건축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가슴 뿌듯한 행복감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동교동 집을 지은 것은 1974년이었다. 거의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던-정확히, 연탄재를 버리는 언덕이었다-산비탈이어서 아주 싸게 매입할 수 있었다. 주택 설계를 많이 하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집을 지을 때는 완성된 설계 도면 한 장이 없었다. 구상과 스케치만을 갖고 현장에서 마음껏 설계를 바꾸면서 집을 완성해갔는데, 잘 알고 지내던 목수와 미장이, 정직하고 장인 같던 일꾼들을 불러모아 공사를 했으니 마감 처리나 견고함에서도 틀림이 없는 집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언덕 위의 하얀 집. 사람들은 그 집을 ‘카사블랑카’라고 불렀다. 370평 대지에 90평 가까운 공간을 갖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비탈의 수목과 어우러져 커 보이지 않는다. 단순하고 평범한, 어느 지중해 언덕에 세워져 있을 법한 하얀 집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재미있는 집’이라는 아내의 표현대로 동교동 집은 일반 주택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입체적인 공간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네모반듯한 평지가 아니라 산비탈이어서 지형 조건의 제약이 많았다. 오히려 그 제약이 창의적으로 공간을 연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마당을 거쳐 집으로 들어오면 접대실과 안방이 있는 일 층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침실로 둘러싸인 거실과 식당, 시청각실 등이 원룸 시스템으로 펼쳐지고 이 중에는 가족실과 서재가 있다. 특이한 것은 각 층이 하나의 공간으로 모두 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공간에 있더라도 가족들의 거동과 동정을 느낄 수 있는 다정함이 있어 좋고, 변화 있게 연결된 여러 공간들이 각자의 사생활을 보장해주면서도 편안하고 따뜻한 스위트홈으로서의 기능을 충족시켜준다.

내부 공간은 부드럽고 밝은 나무의 질감과 단순한 스타코식 흰 벽으로 마감 처리를 했다. 철따라 가구와 집기, 장식품들을 어떻게 옮기고 배치해도 멋스러운, 집안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어주는 훌륭한 여백이 되어주곤 했다.

방들은 향向이 좋아서 햇빛도 잘 들어오고 바람도 잘 통했다. 각 층마다 테라스와 데크 등을 거치면 정원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 늘 가까이에서 자연을 호흡할 수 있었다. 봄이면 벚꽃과 개나리, 진달래와 철쭉, 흰목련, 자목련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고, 수목이 울창해지는 여름이면 가족들과 친구들을 불러모아 바비큐 파티를 벌이곤 했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동교동 집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전망이다. 특히 야경은 지중해의 어느 도시 부럽지 않을 만큼 환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제일 아래층 작업실 앞에 있는 데크에 앉아 야경을 감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강변도로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받아 너울거리는 한강,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듯한 달빛과 별빛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하루의 고단함은 어느덧 씻은 듯이 사라지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상념과 사색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집은 삶의 흔적이며 역사라고 했던가. 건물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그 집이 내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여 있는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교동 집은 결혼 전, 십 년만 고생하면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던 아내와의 약속을 지킨 집이었다. 그렇다고 낭만적이고 호사스러운 생활이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원, 정용, 정헌 세 동생들과 형국이, 소영이, 은영이 세 자녀들까지 그 집에서 공부를 시키고 출가를 시켰으니 대소사가 끊일 날이 없었다. 명절이며, 생일이며, 회사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펼쳐지던 파티이며, 집안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었다. 1995년에 어머니께서, 1997년에 아버지까지 편안하게 임종을 맞으신 곳도 그 집에서였다. 동교동 집은 한 가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좋은 일, 궂은 일, 기쁜 일, 슬픈 일, 그 모두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집이었다.

그런 역사가 담긴 집을 팔고 잠실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나였다. 그 집을 30여 년 동안 가꾸고 관리하느라 너무 많은 고생을 한 아내에게 이제 그만 그 짐을 내려놓게 해주고 싶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 많던 가족들이 모두 떠나고 우리 내외만 달랑 남았다. 집의 크기만큼이나 무거웠던 장남과 맏며느리로서의 책임을 다했으니 이제는 작고 손 갈 일이 없는 집에서 두 사람만의 오붓한 생활을 즐겨보고 싶어졌다.

실로 70년 만에 누려보는 단출하고 고즈넉한 생활이다. 신혼 때는 감히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알콩달콩한 일상들을 아내와 꾸려가며 황혼의 부부일기를 써나가는 요즘은 요즘대로의 재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동교동 집이 그리운 것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직접 설계해서 지은 아담한 삶의 터전에서 온 가족이 살 부비며 살았던 시절, 새로운 사건들과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던 그 소란함과 정겨운 부딪힘, 그런 것들이 사람 사는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동교동 집은 내가 생각해온 집의 의미를 건축적으로 완벽하게 실현한 집이었다. 회갑을 맞이해 발간했던 작품집 ‘빛과 사랑의 건축’에서 나는 집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주거문화란 시설의 멋있음이 아니고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재미일 것이다. 그것은 곧 가정의 행복이다. 가정의 터전으로서의 주거는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러움과 순박함이 있어야 하며 화려함이 아닌 편안함이 있어야 한다. 또한 드러냄이 아니라 담백한 애정의 샘터가 되어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화합할 수 있는 따뜻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어야 한다. 사회생활에 시달린 가족들이 포근히 안기고 싶은 공간, 나와 가족들을 반겨줄 수 있는 그런 집이 내가 늘 생각하는 주택이다.

월남 후 20여 년간 집 한 칸 없이 떠돌던 나의 가족들을 위해, 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둥지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나의 꿈, 그 오랜 꿈이 실현된 공간이 바로 언덕 위의 하얀 집, ‘카사블랑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