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을 여는 건축

내가 건축가 지망생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건축가는 결코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 직업이 아니었다. 차비와 용돈을 충당하기에도 빠듯한 설계사무소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주면 감사하고 주지 않아도 불평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스승이나 제자나 형편이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다 함께 쪼들리면서도 오로지 창작을 한다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버텨야 했던 빈곤의 시대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내가 직접 설계사무소를 운영할 때도 건축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 설계를 맡겨놓고 당장 며칠 뒤부터 도면을 내놓으라고 빚쟁이처럼 닦달하는 몰이해한 건축주들을 만나는 일은 예사였다. 그리고도 도중에 마음이 바뀌면 설계비를 안 주는 것도 예사였다. “설계비를 일부라도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중하게 청구를 하면, “아니, 연필하고 종이밖에 들어간 게 없는데 무슨 돈을 달라는 거요!”라고 강짜를 부리는 데는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설계비를 깎겠다는 건축주, 설계안을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공산품 정도로 아는 건축주, 내 돈을 내고 내 건물을 짓는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해주시오, 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건축주, 설계비를 주지 않고도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뻔뻔한 건축주…….

50년 넘게 이 땅에서 건축가로 활동해오면서 늘 안타까웠던 것은 건축에 대한 이러한 일반의 몰이해, 전문가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는 비문화적인 풍토였다.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선생님으로 예우 되는 건축가에 대해서는 깍듯하게 대접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건축가의 권고가 설령 자기 뜻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건축주는 결코 그 의견을 폄훼하지 않는다. 그것은 건축이 개인의 소유인 동시에 도시와의 조화, 이용자와 행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용자에게 유용하고 아름다운 건축이 되어야 한다는 공공의 성격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건축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달라지고는 있지만, 높은 긍지와 자부심으로 일하는 건축가들의 기대 수준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 건축이 개인의 소유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문화’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9년은 한국 현대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해였다고 할 수 있다. 문화관광부가 20세기의 마지막 해를 ‘건축문화의 해’로 선포하면서 한국 건축계는 축제와도 같은 한 해를 보내면서 건축이 총체적 문화 행위임을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건축이 문화의 당당한 한 분야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건축계가 놀랄 만한 단결력으로 하나가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단기간에 수행해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건축계에 산적되어온 과제들이 많았다는 뜻이고, 문화의 주체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한 건축인들 내부에 분출되지 못한 욕구와 에너지가 컸다는 뜻도 될 것이다.

’99 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수락하게 된 것은 건축문화의 해가 절반쯤 흘러가 버린 그해 6월이었다. 초대 위원장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임을 하면서 후임자로 초빙된 것이었다. 조직위원회가 발족할 때부터 위원으로 함께 일해왔기 때문에 수장의 역할을 해나가는데 실질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재정의 확보는 시급히 해결해야만 할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차도 휘발유가 없으면 굴러가지 못하듯 좋은 사업계획들을 많이 세워놓았는데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해 그것을 집행해나갈 수 없다면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문화관광부에서 예산을 보조해주는 사업은 고작 몇 가지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예산을 확보해서 집행해야 하는데 건축계에 그만한 재원이 확보되어 있을 리 없었다. 6개월밖에 남지 않은 건축문화의 해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느냐 마느냐도 결국 재원을 어떻게 충당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나는 고심한 끝에 건축계에 각출을 제안했다. 나부터 돈을 내놓고 우리가 돈을 내놓아야 남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손을 벌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을 호소했다. 건축과 관련된 기업의 대표들을 방문해 협찬을 받아내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IMF 경제체제 하에서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도 기꺼이 거금을 쾌척해주신 부영건설 이중근 회장님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찬조에 동참해주셨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계획했던 행사들을 차질없이 치러낼 수 있었음을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99 건축문화의 해에 우리가 입이 닳도록 외쳤던 슬로건은 건축은 ‘삶의 터전, 문화의 바탕’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문화 행위의 바탕이자,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표상하는 문화자산인 건축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시민들과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는 문화적 대상으로 건축의 가치를 되돌리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자연과 화해하는 건축, 전통가치의 아름다움이 미래의 삶 속에서 재창조되는 건축을 실현하고자 하는 건축인들의 의지가 집약된 표현이기도 하다.

조직위원회의 사업은 밀레니엄 사업, 건축문화의 위상 정립, 건축문화운동, 건축문화 관광 자원화라는 4개의 큰 틀 속에서 17개의 행사로 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현대미술관 개관 이후 최대의 관람객 수를 기록한 「한국건축 100년 전」은 ’99 건축문화의 해를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행사였다. 그동안 건축계에서 합의가 되지 않았던 한국 현대건축 100년의 시대 구분, 근대성과 지역성의 정의, 작품 선정 기준 등을 토론을 통해 정리해냄으로써 한국 건축의 미래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걸음을 내딛게 해주었다.

26명의 건축 전문가와 200여 명의 대학원생들이 1년 동안 조사하고 집필에 참여해 완성한 「전국 건축문화자산」도 ’99 건축문화의 해에 이루어낸 값진 결실로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애초 우리의 의도는 학술자료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관광자원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쉬운 점은 완성된 재료를 문화관광부에 제출했는데 건축문화의 해가 끝나면서 건축 관광자료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수백 명이 전국을 발로 뛰며 쓴 귀중한 건축문화자산 자료를 정부의 이해 부족으로 사장시키고 말았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돌이켜 보건대, 1999년은 시민과 함께 건축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건축인 모두의 소명 의식과 열정이 최고의 빛을 발했던 한 해였다. 또한 선조에게 물려받은 훌륭한 건축문화유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제 건축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 현실과 건축계의 구조적 모순들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값진 경험은 건축인들에게 새로운 밀레니엄을 어떤 변화된 자세로 맞이해야 하는가, 라는 시대적 과제를 남겨주었다.

나는 여전히 일부 몰지각한 건축주들, 건축을 문화로 인식하지 못하는 후진적인 한국의 풍토를 탓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건축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넘어야 할 편견과 몰이해의 장벽일 뿐이다. 나는 그 장벽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을 ’99 건축문화의 해, 우리 건축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응집력과 강한 실행력을 통해 확인했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것은, 건축문화 발전을 외쳤던 그 하나 된 목소리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하는 점이다.

’99 건축문화의 해에 우리가 화두로 삼았던 과제들, 추진했던 사업들은 결코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어느 하나도 잊혀져서는 안될, 오랫동안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중요한 사업들이며 자료들이다. 그 사업과 성과물들이 후배들에게 이어져 또 한 세기를 보다 풍성하게 채우는 초석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건축문화 강국, 한국을 만들어가는 가장 빠르고 현명한 지름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