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없는 나무들

아버지가 평양의전을 휴학하고 자동차 운전 교습학원이라는, 당시로는 생소하기만 한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종잣돈을 대주시면서 이렇게 격려하셨다고 한다. 

“걱정 말아라. 언젠가는 의사들이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사람 고치시오! 하면서 돌아다닐 날이 올 테니…….”

앞날이 보장된 직업을 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신 아버지나, 또 그런 자식을 믿고 밀어주신 할아버지나 당시로써는 보기 흔치 않은, 열린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그러한 자유주의적 기풍은 집안의 내력과도 같이 후대들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즉, 집안의 장남인 내가 의사나 목사처럼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인정받는 직업이 아닌 ‘건축’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나의 결정을 믿고 지지해주었던 아버지처럼 나 역시 내 자식들에 대해 똑같은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의 선택이 나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믿고 존중해주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임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어냈을 내면의 갈등을 내 자식들을 키워봄으로써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한가지일 것이다. 인생의 몇 굽이를 먼저 돌아온 부모의 눈에는 자식에게 안락하고 성공적인 미래를 보장해줄 길이 대충은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구상을 갖고 뒷받침을 해주고 늘 앞서나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먼저 고민하고, 먼저 좌절하고, 그리고도 먼저 마음을 수습해 자식들이 제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아무리 퍼주어도 아쉽고 모자란 사랑, 자식을 향한 내리사랑이 아니겠는가.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자식들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구상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 아들 형국이가 중학교 때, “아버지, 아버지는 「정림」을 한국 최고의 건축 사무소로 만드세요. 저는 「정림」을 세계 최고의 건축 사무소로 만들게요.”라면서 내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을 때도 나는 그 말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기만 했었다. 솔직한 심정대로라면 아들이 건축가가 되어 가업을 물려받게 되는 것만큼 가슴 뿌듯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기대와 욕심 때문에 아들의 장래가 좌우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본인이 원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내 자신감이 오만이었는지 형국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뚜렷이 정립하기 시작했다. 대학 입시가 전부인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삶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를 봐라. 그분은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훌륭하게 해낸 세계적인 위인이다. 너에게도 교회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일단 대학에 가서 세상을 헤쳐나갈 너의 전문성을 획득한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해도 늦지 않다는 거다.” 

하지만 건축에 소질도 있고 능력도 있어 보였던 아들은 앞길이 어느 정도 보장된 건축보다는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마음이 있었다. 아들의 그러한 바람을 가족들은 청소년기의 열정에 의한 것으로 여겨 반대했다. 하지만 아들은 끝내 요지부동이었고, 나는 아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어렸을 적부터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했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뿐 아니라, 자기 논리도 분명한 아이였다. 부모의 기대와 다른 길을 갈 수는 있어도 부모를 실망시키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굳이 아들의 뜻을 꺾지 않았다.

결국 아들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들어가 기독교학생회 일에 열정을 쏟아붓더니 졸업 후, IVF 한국기독학생회의 학원 선교사로 대학생들을 위한 활동을 5년이나 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박사가 되어 10년 만에 귀국해 지금은 ‘나들목 사랑의 교회’의 목회자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다. 십 대 후반에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아들. 지극히 세속적인 아버지의 욕심으로 나는 그런 아들의 발목을 붙잡을 뻔한 적도 있었다.

“형국아, 지금이라도 건축을 시작해볼 생각이 없느냐? 네가 하려고만 한다면 늦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밀어주마.” 

아들이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졸업 후의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밤이 깊도록 대화를 나누던 끝에 나는 오랫동안 감추어두었던 마음을 내비쳐 보았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버지, 두 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한 번은 건축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는 단 한 번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세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움을 느꼈다. 말로는 자식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해놓고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못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해서 욕심과 미련을 접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떻게 그 들끓는 마음을 다스려냈는지 새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런 천성과 고집은 어쩔 수 없는 내력이구나, 네 갈 길을 가라! 깨끗하게 포기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식 셋 중에 비교적 순탄하게 제 인생행로를 정하고 그 길을 어려움 없이 걷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장녀 소영이다. 음악을 무척 좋아한 아내는 일찍이 아이들 셋 모두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형국이는 피아노를 포기한 대신 기타를 잘 다루고, 막내 은영이는 고교 시절 전국 콩쿠르에서 1등으로 뽑혔을 만큼 플루트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장녀 소영이만 예고와 서울대학교 음대, 미국 유학까지 정통 코스를 밟아 현재 강단에서 후진 양성을 하고 있다.

소영이는 자식 셋 중에 가장 내성적이고 연약한 성품이라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걱정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아이라 어느새 두 사내아이의 엄마로, 아내로, 강사로, 주부로 1인 4역을 꿋꿋하게 잘 해내고 있다. 말도 많지 않고 언제나 조용조용 움직이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적절한 때에 유머를 터뜨려 가족 모두를 웃게 하는 소영이를 보면 대견하고 기특하기 그지없다.

막내 은영이는 놀라우리만치 긍정적이고 강인한 기질을 가진 아이이다. 그토록 좋아하고 재능도 인정받았던 음악가의 길을 접게 되는 아픔 속에서 서울여대 사학과로 진로를 변경하면서도 마음이 아파서 쩔쩔매는 아빠와 엄마를 오히려 위로해주었던 녀석이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로 딸 하나를 키우며 지내고 있는데, 가치관이 뚜렷하고 제 엄마를 닮아 사람들을 배려하고 돕는 마음이 남다른 아이라 어딜 가나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몫들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칠순 생일에 은영이가 이런 글로 아버지에 대한 제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 떠오른다. 

“일등이나 좋은 대학 간판, 그런 건 인생에서 잠깐 같아요. 진정한 행복이란 하나님을 알고, 인생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발견하고 그 일을 잘 감당하고 있을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한 게 아닐까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게 세상을 살아가는 든든한 신앙을 물려주신 것,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빠, 엄마가 저희를 이렇게 키워주신 만큼 저도 제 아이를 긍정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늘상 제 언니만 더 예뻐한다고 투정을 부리던 막내가 어느덧 마흔 고개를 넘어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런 이야기를 표현해줄 때 나와 아내의 가슴에는 기쁨과 안도감이 물밀 듯 밀려오곤 한다. 우리가 자식들을 잘못 키우지는 않았구나, 우리 아이들은 어딜 가든 하나님의 자녀로 제 몫을 해내겠구나, 하는.

아들이 목회자가 되고 나서부터는 나와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동생들과 사위들까지 가족 모두가 ‘나들목 사랑의 교회’를 통해 함께 섬기며 한 목적점을 향해 걸어가는 더욱 끈끈한 가족애가 생겨났다. ‘나들목 사랑의 교회’는 ‘찾는이 중심’, ‘진실한 공동체’, ‘균형 있는 성장’, ‘안팎의 변혁’을 실천하는 열려 있는 신앙공동체이다. 젊고 파격적이지만 신중함과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아들의 목회 활동이 나와 아내의 신앙적 깊이는 물론 인생관까지도 성숙시켜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나와 아내는 아들을 통해 믿음이 더욱 신실하게 되었다.

내게는 평생의 신앙생활을 통해 얻게 된 부담감이 한 가지 있다. 나그네의 길을 걸어가는 자로서 나는 ‘청지기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얼마 전, 나와 아내는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고 재단설립에 관한 동의를 구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재산을 재단을 설립해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것이 부부의 생각이지만, 그 재산의 상속권이 있는 자식들의 의견도 당연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우리를 재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어요. 그동안 저희가 누린 것, 지금도 누리며 사는 것, 그것만으로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뜻대로 좋은 일에 쓰세요. 그리고 그런 좋은 일에 저희들도 참여 시켜 주십시오.”

그것이 세 아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적든 많든 유산으로 받을 수 있는 몫을 아낌없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에게 새삼 놀라고 감사했다. 내가 쌓아 온 믿음보다 더 순수하고 깊은 신앙심이 이미 뿌리내린, 욕심 없는 나무들을 보는 듯한 가슴 뭉클한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만이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했던가. 내 자식의 자랑도, 남의 자식의 험담도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언제든 조심스럽고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다. 자식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는 지금 이 순간도 적지 않은 마음의 부담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 뒤에서 우리가 뿌린 것보다 더 풍성하게 거두시게 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물질이 아닌, 믿음을 가장 큰 유산으로 여기며 나누고 베풀며 사는 삶에서 행복을 찾는 나의 세 자녀들.

나와 아내가 부끄러움 없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하나님을 믿으세요!’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