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사람들

어머니께서 권사로 계셨던 후암장로교회. 1967년, 후암장로교회의 설계 봉사를 맡은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후암장로교회는 나의 첫 교회 작품이었다. 그때는 교회 설계와 건축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교회 양식의 전형에서 탈피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본 것이었다. 우선 교회의 상징이던 종탑을 없애고 외관을 최대한 모던하게 단순화시켰다. 내부 공간은 중앙 지붕의 높은 천장 부분과 양측의 낮은 부분으로 대비적으로 변화를 주고, 예배 분위기가 좀 더 경건해질 수 있도록 채광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또한 음향효과를 고려하여 벽돌로 벽화벽을 두고, 예배당 전면에 천사의 찬양이 울려 내려오도록 성가대석을 제단 뒤편에 두었다.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들은 상당히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건물이 완공된 이후, 기대 이상의 찬사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건물을 짓고자 하는 목사님이나 교인들이라면 한 번쯤 꼭 들러봐야 할 교회로 추천될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교회를 구경하러 오시는 분들이 줄을 이었다. 과분하게도, 후암장로교회는 교회 건축과 예배공간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현대 교회 건축의 프로토타입이라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첫 교회 설계 작품인 후암장로교회를 나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셨던 분이다. 평소 어머니의 간곡한 기도와 소원대로 나는 1989년에 후암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임명받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적 성품을 나누어 가진 나의 네 형제들. 각각의 개성이 너무도 뚜렷하여 제 갈 길들을 알아서 개척해나간 나의 자랑스러운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형제 건축가이자, 동업자로서 40년을 함께 해 온 정식이. 남들은 형제가 어떻게 한 지붕 아래서 40년을 함께 해올 수 있었냐고 놀라워하지만, 나는 우리가 남이 아니라 형제였기 때문에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형제라는 무한한 애정과 신뢰의 바탕이 있었기에 서로의 장점은 살려주고 부족한 부분은 메워 주면서 각자의 분명한 개성과 스타일을 조화시키면서 회사를 균형 있게 발전 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연세대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 병원 외과 의사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뉴욕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셋째 정완이는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다. 아내는 의대생 시절의 정원이가 한 살 된 조카 형국이를 안고 어르면서 책을 볼 정도로 다정다감하고 세심했었다고 기억한다. 힘드니까 내려놓고 공부하라고 해도 괜찮다고 웃으면서 조카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을 만큼 사랑했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미대를 나와서 공주대학교 교수로 후학 양성과 사회 참여에 힘쓰고 있는 막내 정헌이는 예술가답게 자유분방하고 소신과 고집이 뚜렷한 녀석이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기로도 유명한데, 그 고집을 꺾기가 만만치가 않다. 놀라운 것은 교회는 안 나가더라도 담배만이라도 끊어달라는 큰형수의 간곡한 부탁을 녀석이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금단의 어려움을 이기고 담배를 끊은, 금연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몇십 년 골초가 담배 끊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담배를 끊고 나니 얼굴빛이 다 환해져서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넷째 정용의 이야기를 뒤로 미룬 것은, 우리 형제 중에 가장 의리와 카리스마가 있었던 정용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법대를 나와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농림부 차관보로 근무하던 중에 과로로 인한 뇌경색으로 순직했다. 짧은 인생을 굵고 멋지게 살다간 참으로 훌륭한 동생이다. 

장례식 때도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지난 1월에 10주기 행사 때에도 적지 않은 농림수산부 동료들과 후배들이 모여 동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추모제에 참석할 때마다 정용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참, 멋있게 살았다, 제 몸을 사리지 않고 바른말, 소신 있는 공무원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갔다, 사회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매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제를 갖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동생들 중에서도 먼저 가버린 동생이기에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큰 것이겠지만, 그만하면 족히 올바르게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불러갔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용은 정말 멋있게 살다간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다.

마지막으로 ‘친구 같은 나의 아들’, 형국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어느 날 카페테리아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아들의 모습을 아들의 친구가 우연히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들과 나는 서로의 생각에 대해서 교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누어왔다. 물론 세대 차이, 입장의 차이 등으로 서로 동의가 되지 않는 주제들도 많다. 하지만 논쟁이 아니라 의견으로 서로의 차이를 좁혀나갈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오랜 우정’ 같은 부자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건축가로서 가업을 물려받는 일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이 항상 먼저였던 아들은 현재 나들목 사랑의 교회의 목사로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내가 아들에 대해 늘 대견하게 여기는 부분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세상적, 물질적 가치에 의연하다는 점이다. 건축가가 되었다면 순탄하게 갈 수 있는 성공의 길을 마다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기를 자청한 아들은 지금도 풍족한 삶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늘 소탈한 옷에 낡은 차를 타고 다니는 아들이 안쓰러워 별도의 돈이라도 쥐여주고 싶지만 소용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아내도 나도 겪을 만큼 겪었다. 번번이 사절 당하면서도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 안달을 내는 것,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형국이. 

이렇듯 건전하고 바른 정신을 가진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5형제 중 누구든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어머니의 기도가 마침내 손자 대에 이르러 이루어지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기쁘기 한량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