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철 건축연구

감성적 합리주의 건축가

성균관대학교 건축과 교수 임창복

성장배경

건축가 김정철은 1932년 8월 1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평소 바이올린을 좋아해 새로이 배울 정도로 음악에 열정을 가진 사업가였고 모친은 신앙심이 남다른 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부모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평범하게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 다니는 일에는 특히 열심이었다 한다. 집안에서는 그의 숙부님이 의사이기도 하셨고 그 자신이 신앙심이 강한 소년이었기도해 의사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가 태어나 성장했던 1930년대부터 해방되기까지의 남만주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운 후 대규모 철도와 도시건설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던 곳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천승선생도 경성고공을 졸업한 후 큰 일을 배우기 위해 남만주 철도회사로 옮길만큼 대련은 새로운 건축활동이 활발했던 도시였다. 따라서 새로운 양식의 건물과 도시가 개발되던 항구도시 대련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 그가 후일 건축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동기가 되었을 뿐아니라, 건축과 도시와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 조화된 도시를 지향하는 그의 건축관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해방과 더불어 그도 의지에 살던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 이북의 사회적 분위기에 회의를 느껴 2년정도 머물고는 가족 모두 4차례에 걸쳐 남한으로 월남하게 된다. 곧이어 일어난 6.25라는 민족간의 전쟁은 그가 학업을 마치기도전에 학도병으로 종군하게 만든다. 전쟁의 최일선에서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그는 50년 11월 커다란 부상을 입게된다. 그러나 그는 중상을 입고도 기적과 같은 회생을 하게되고 이때 경험한 삶과 죽음에 대한 체험으로 두고두고 인생을 기독교적 교리에 근원을 두고 살아가는 계기로 삼는다. 당시의 경험은 그에게 덤의 인생을 산다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게 하는 여유를 주었고, 매사에 신중하며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성격을 형성시켜준 것으로 보인다.

건축 수련기

김정철은 1952년 제대한 후 서울대 건축과에 입학하여 1956년 10회로 졸업한다. 비록 소년기의 경험으로 건축에 대한 막연한 꿈과 동기는 있었으나 그가 건축에 대해 본격적인 탐구와 수련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대학에 재학하면서부터라고 술회한다. 그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서울대학교의 스승으로는 이균상, 김희춘, 윤장섭, 김근덕, 김홍주 교수등이 계셨고 김정수교수는 강사로 출강하고 계시던 시절이었다.

김희춘교수는 당시의 학교 사정이 전쟁후라 물자가 부족하고 시설도 열악한 상태였으나 김정철은 건축수업에 남달리 성실했다고 회상한다. 그런가하면 그는 재학시절에도 교외건축활동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학교생활을 보낸다. 특히 55년 재학생을 있으면서 동료인 이상순, 신국범씨 등과 함께 「서울시 의사당 현상설계」에 참여해서 2등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얻기도 한다. 당시 작품은 뉴욕의 「레버하우스」에서 영향받아 포디움 부분과 고층부를 균형감있게 표현한 것이었다.

한편 졸업후에는 이천승선생과 김정수선생이 이끌고 계셨던 「종합건축」에 입사해서 본격적인 건축가의 수련과정을 밟게 된다. 아마도 이때 받은 그의 건축 수련과정이 후일 「정림건축」 이념의 골간을 이루는 것이어서 특히 중요한 기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건축의 국제적 조류는 월터 그로피우스가 하버드에서 바우하우스류의 건축교육을 한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자연히 그의 건축철학이 크게 전파되는 기간이었다. 특히 김정수교수는 「종합건축」에서 언제나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 탐구’나 ‘기능적 조형미’를 강조하셨고 그를 따르던 김정철은 당시의 국제적 건축사조인 김정수교수의 이러한 건축관에 자연스럽게 영향받은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1차대전후 태동된 근대 합리주의적 사조가 태동될 때와 사회적 상황이 매우 유사해 초기 바우하우스나 국제주의 양식과 같은 합리주의적 경향이 쉽게 수용된듯하다. 작가 김정철이 ‘건축가는 사회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든지 ‘토탈 아키텍처의 추구’ 그리고 ‘팀 어프로치’를 강조하는 것등은 모두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나 하버드에서 주장하던 건축교육의 내용들이어서 김정철이 합리주의적 경향을 추구하는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더욱이 그로피우스가 「Bunt ist meine Lieblingsfarbe」라고 주장한 것도 김정철이 수용하고 있는 건축철학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즉 생활의 어떤 부분을 특성화시켜 보려는 편협한 교조적 가친관을 배제하며 생활의 모든 부분을 무리없이 수용하려는 집년도 바로 이러한 건축관의 일부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58년까지 「종합건축」에서 근무한 후 약 6개월간 산업은행의 주택사업기관인 ICA기술실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ICA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임덕문, 김중업 등이 모여있는 곳이었고 많은 건축가들을 끌어들일 만큼 다양하고도 풍부한 일거리가 있었던 기관이었다. 당시는 전쟁으로 파괴된 많은 주택을 효과적으로 건설하고자 보건사회부에서 ICA 자금으로 「전국주택설계 건축자재 현상공모」를 시행하기도 한 시점이었다. 1958년 3월에 마감한 제1회 현상설계에서 김정철은 제4부 「동리계획」 부문에서 안영배와 공동작품을 출품하여 1등을 수상하게 되고, 이로부터 점차 김정철은 작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마련된다. 격동하는 이 시기에 그가 또 다른 형태의 건축수련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한국은행에 입사하면서이다. 당시 전창일선생이 책임자로서 있던 「한국은행 시설과」에 이천승선생이 천거하고 또 그 자신도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자 입행을 결심하게 된다. 당신 은행이라는 기관은 보수적이면서도 합리적이며 국제적 감각을 지닌 테크노크랫이 모여있는 국내 최대의 엘리트집단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합리적인 조직체 속에서 그는 약 10년간 한국은행의 각종 지점계획과 설계경험을 쌓은 후 67년 동생인 김정식과 함께 사무소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을지로 시대: 조직건축의 태동기

작가 김정철이 공식적으로 사무소를 개업하는 것은 1967년 6월 17일이다.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약관이랄 수 있는 36세의 나이에 동생인 김정식과 함께 소위 「을지로시대」의 「정림건축」을 태동시킨다. 당시의 사정을 창립 멤버이면서 아직까지도 정림을 이끌어 오고 있는 김창일, 권도웅은 “24평 남짓한 단층 사무실에서 30여명의 하객과 7명의 직원으로 조촐한 개업행사를 가졌으나 무엇하나 변변한 것 없이 제도판과 삼각자, 스케일, 몇 권의 참고적이 전부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당시 김정철이 내세운 사무실의 운영지침을 살펴보면 「정림건축」 사반세기의 반석이 이때 이미 마련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미래 지향적이 창작활동을 통하여 영구적인 국가발전과 환경개선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조직적으로 종합적인 창작활동을 통하여 기술혁신과 완벽한 토탈 디자인을 수행한다” “부단한 기술개발과 축적을 도모하여 기술수준을 국제화하고 나아가 국위선양 및 외화의 절약,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당시의 아틀리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국제화, 조직화, 근대화 등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앞선 사고를 제시한다.

개업초기라 여러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 시기 「서울여대」, 「대광고교」의 교사와 강당 등과 같은 교육시설의 디자인에 참여하게 되었고 「대성목재 월미 합판공장」이 완성되는  기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산구에 지은 「후암교회」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의 건축관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초기의 걸작이다. 즉 단순한 외관형식과 함께 장로교의 기능, 음향효과 그리고 채광방식의 조화를 통하여 영적인 내부 분위기를 연출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특히 내부공간에서는 측랑이 있는 바실리카 평면형식을 채택하고 노출 콘크리트 골조와 측벽의 변색벽돌 릴리프 구현은 과거 요소를 현대적으로 구현해 보려는 작가 김정철의 건축철학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주는 작품이다. 

교조적 모더니즘을 신봉했다면 자유로운 평면을 시도할 수도 있었을텐데 유구한 교회건축의 전형인 바실리카 양식의 평면을 채택하면서도 성가대나 2층 회중석의 처리에서 보듯이 대지조건에 맞는 합리적인 형식으로의 변형을 시도하고 재료의 선택과 표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한 것 등에서 김정철이 지녔던 모더니즘에 대한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교회건축과 은행 건축외에도 「정림」을 같이 이끌던 김정식과 함께 공장 프로젝트에도 참여한다. 그 인연으로 울산 석유화학공단 배후시설인 「한양 하우징 컴플렉스」를 수주함으로써 을지로에서 북창동으로 이전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김정철에게 「을지로시대」는 「후암교회」에서 보듯이 엄격한 장인적 기질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새롭게 시도해보려는 노력과 보다 순수한 형태를 추구하려는 집년이 성숙되는 과정이었으며 그의 사무소 운영지침에서 보듯이 사무실을 조직화하는 첫 단계의 기간이었다.

북창동 시대 : 조직건축의 성장기

김정철이 작가로서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는때는 1970년 2월 북창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하며 각고의 노력을 하던 4년간이다. 당시의 작품으로는 「대명동지점」, 「부산은행 범일동지점」, 「한국은행 수원지점」과 같은 은행관련 프로젝트가 점차 많아지고 「예일여자 중·고등학교」, 「대광중·고등학교 체육관」, 「보성여자 중·고등학교」, 「숭실여고 교사」 등과 같은 학교시설, 그리고 「루터란교회」, 「동숭교회」, 「동대문감리교회」와 같은 교회건축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 시기 김정철이 남들보다 한 단계 뛰어넘는 한국의 선두그룹 건축가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에 당선된 것이 그 계기였다.

60년대말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건축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70년대초부터는 60년대 경제성장에 힘입어 점차 대형 프로젝트의 현상설계가 쏟아져 나오던 기간이었다. 72년 실시된 「여의도 KBS 본관」 현상설계를 필두로 이듬해 「세종문화회관」의 현상설계가 있었으며 바로 「외환은행본점」 현상설계가 개최된다. 특히 「외환은행본점」 현상에는 당시 국내 유수의 건축가 12인이 초청되었고 설계기간도 3개월이나 주어졌으며 비교적 거액의 제작비를 현상비로 지불한 국내초유의 대규모 현상설계였다.

최초의 계획안은 지상 35층에 연면적 24,700평에 달하는 것이었다. 대지 추가 매입이나 층수를 낮추는 문제등이 추후에 발생되기는 했으나 이 건물은 한국에서 최고층시대를 알리는 건축적 의미가 있다. 이 건물은 「조흥은행본점」이나 「상업은행본점」에 뒤이어 계획된 것이었으나 체계적인 프로그램 작업에 근거해서 수행된 대형 고층건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건축기술수준 향상의 계기를 마련해준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당시 「외환은행본점」의 설계를 위해 구조, 기계, 전기, 방재, 조경 그리고 환경 조형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동설계를 진행하여 비로소 조직화에 의한 토탈 디자인을 구현하면서 기술과 디자인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건축적으로 볼때 「외환은행 본점」은 사무공간을 타워로 처리하고 은행객장 공간은 포디움으로 처리해서 두개의 매스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배려한 것이 이 건물조형에서 보여지는 외관상의 특징이다. 이외에도 은행으로서는 처음 시도한 담장의 제거, 선큰가든 처리에 의해 명동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건축의 감각을 느끼게 해준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정철 특유의 표면처리감각과 디테일의 처리는 주목해 볼만한 부분이다.

그는 건축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가 표면처리술로 이해하고 있었고 일찌기 「외환은행 부산지점」이나 「제분회관」에서 타일외관을 실험해서 크게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외환은행본점」의 외장타일은 기술적이며 의장적인 이러한 실험을 거친 후에 시도된 것이어서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외환은행본점」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그는 한국 금융계의 중요 현상설계에 참여해 좋은 반응을 얻는다. 「한국산업은행본점」현상설계 당선, 「한국은행본점」 현상 1등, 그리고 그가 「신탁은행본점」현상 당선 등이 당시 그가 참여한 주요 현상 프로젝트들의 결과이다.

한국현대건축사에서 70년대는 60년대부터 진행된 경제개발의 결과로 어는정도 자본축적이 이루어진 상황이었기에 주택건물에서나 상업건물에서 대량공급이 이루어지는 시대였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에 의해 고층화되는 서울의 도심에서 「외환은행본점」이라는 초고층 건물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작가로서 김정철의 위치는 확고하게 된다. 특히 조직을 바탕으로한 건축적 접근에 대한 건축주들의 신뢰에 힘입어 그는 다른 여러 고층건물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다. 작가 김정철이 한국고층건물의 선두주자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이화동 시대: 조직 설계의 전성기

1975년 「외환은행본점」 설계로 건축가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되는 김정철은 다시 사무실을 이화동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그는 비로소 자신이 오래동안 꿈꾸어 오던 조직화에 의한 설계를 보다 본격적으로 체계화하게 된다. 그동안 대부분의 사무소들이 구조나 설비등을 외주주는 것이 관례화되었던 상황에서 현대건축이 단순히 형태계획안에 의해 훌륭한 건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는 ‘이화동사옥’ 을 갖게됨과 동시에 조직의 활성화에 심혈을 기울인다.

건축의 계획 및 설계를 담당하는 주무부서외에도 기획실, CAD 실, 실내장식, 조경, 견적, 감리, 구조, 전기설비, 기계설비 등을 분화시켜 하나의 조직속에서 일관된 작업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조직에 의한 건축’과 ‘토탈 아키텍처’ 의 꿈을 실현시킨다. 즉 든든한 기술적 뒷받침이 있기에 보다 과감한 형태의 시도가 이루어지는 이때가 바로 작가 김정철과 「정림건축」의 전성기라 할만한 시기이다. 일찌기 「후암교회」와 「노량진교회」 등 이전의 교회건축에서도 이미 독특한 건축언어를 개척한바 있는 김정철은 70년대 후반 「정동감리교회」나 「전주서문교회」에서 좀더 새로운 교회건축관을 개척해 나간다. 즉 의식에 치중하는 구교와 달리 신교에서는 성경말씀에 치중해야하므로 말씀이 영적으로 잘 교화전파될 수 있는 교회건축이 되어야함을 역설하면서 그는 보다 많은 신도를 수용하기위해 구형보다는 부채꼴을 채택하거나 주공간에 니치를 형성하는 식으로 하여 인간적 스케일이 될 수 있도록 계획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의 외형에서도 수직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교회가 지역의 시설로 기능해야 한다는 신념하에서 종탑을 최소화하며 제단과 회중석의 차이를 없애고 주변 도시문맥에 어울리도록 하는 인간중심적 건축관을 개척해 나간다.

그의 작품에서는 도시건축물로서의 상징적 표현도 남달리 강조된다. 특히 77년에 계획된 「종합전시장」은 48미터X156미터 규모의 특별전시장을 갖는 건물임에도 리듬감있게 처리한 입체트러스와 벽체, 지붕부분의 분리에서 보듯이 전체적으로 한국전통건축을 상징적으로 현대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중의 하나이다. 즉 그는 이화동으로 이전해 오면서 기능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적 사고’, ‘도시문맥의 강조’ 그리고 ‘전통과 상징성의 추구’ 등에 많은 열정을 기울인다.

이렇게 조직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로 평탄한 건축항해를 계속하는 그가 시련에 부딪치는 것은 80년대초 「한국은행본점」 설계를 진행하면서부터 이다. 물론 「일양건축」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어서 작업상의 어려운 측면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당시 발주자의 다양한 요구는 김정철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합리적이며 기능적인 사고가 모든 건축주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건축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주자를 맞게된 당시는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의 물결이 점차 밀려 들어오던 시기의 사건이어서 새삼 건축과 사회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이 기간에 우리사회가 변화하고 있음과 그에 따른 새로운 건축적 욕구가 점증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50년대 이래 일관되게 추구한 합리성이 변화된 사회에서는 이상적 목표가 될수 없음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70년대까지 김정철 작품의 핵심이 ‘기능’ 이었다면 80년대부터는 ‘다양한 형태’의 추구가 새로운 목표가 된다. 물론 건축의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가 다른 요소의 절대적인 결정인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김정절의 건축에서는 분명히 80년대를 기점으로 그의 관심의 초점이 달라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구체적 사례가 「한국수출입은행본점」이다. 여의도라는 무미건조한 환경속에서  자기표현을 중요시하려는 ‘화강석과 유리의 대비적 표현’ ‘사선요소의 채용’ 등은 모두 기능보다는 형태에 보다 큰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정면성을 부각시키며 상징적 이미지를 추구한 「단국대학교 퇴계기념 중앙도서관」이나 대칭성과 상징적 조형미를 추구한 「기독교 100주년 순교자 기념관」도 그 자신이 개발했던 70년대의 건축 조형언어와 비교해 볼때 크게 다양화된 측면이 있다.

그런가하면 포스트 모던 계열이라 할수 있는 「이대 부속유치원」과 「이대 중앙도서관」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며 소위 레이트 모던 계열로 볼수 있는 「한국투자신탁 동래지점」, 「아남산업 반도체공장」, 그리고 「삼보컴퓨터사옥」 등이 그가 최근 관심있게 진행한 변주곡들이다. 80년대의 「이화동시대」에서 김정철은 기능과 합리성의 추구로부터 탈피해 점차 변모하는 사회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를 추구한다.

맺는 말

이상으로 작가 김정철이 건축가로서 성장해온 배경과 작품에 나타난 그의 건축적 사고의 변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일제시대에 성장시기를 보내야했고 해방이 되어서는 기이 비정함을 체험하기도 했으며 청년이 되어 배우고자 했을때는 6.25가 일어나 온몸으로 전쟁을 막아야 했던 시대였다. 따라서 근검과 절약 그리고 합리주의적 사고의 틀은 구태여 누구의 영향에서가 아니라 작가 김정철에게 형성된 하나의 인생철학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냉철한 서구의 합리주의적 틀에만 얽매여 있던 작가가 아니었음은 80년대 이후 전개된 그의 다양한 작품에서도 읽을수 있다. 자신이 늘 강조하듯이 그는 작가만의 조형의지를 실험하는 아방가르드라기 보다는 항시 사회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건축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건축가이다. 따라서 특이한 건물을 짓기보다는 좋은 건물 짓는 것에 만족하고 사진찍어 잡지에 내는 것으로 건축가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건물이 완공된 후에도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용자의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작가이다. 특히 한국현대건축의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볼때 김정철은 건축근대화의 의미를 일찌기 간파하고 이땅의 건축을 근대화하는데서 전위적 역할을 담당한 건축가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건축을 구성하는 여러가지 요소 즉 재료와 공법 그리고 인적 구성과 조직에 이르기까지 수입업자의 역할을 배격하며 건축실무의 모든 면에서 끊임없이 토착화를 실현해온 건축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예견하고 조직화에 의한 설계를 이 땅에 정착시킨 건축가라는 점도 크게 평가받아야할 부분이다. 건축이란 한 나라의 문화를 대변하는 가장 구체적인 활동이다. 김정철에 의한 건축근대화의 노력과 토착화 노력 그리고 조직화에 대한 노력은 분명히 한국의 현대건축문화를 진일보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것이다. 김정철은 성실한 평범함이 곧 비범함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이 시대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감성적 합리주의 건축가’ 라고 평가하고 싶다.

자료 및 정보 출처

《빛과 사랑의 건축》, 1992, 237~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