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웍속의 건축가 안영배 (당시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1987

방철린. 안 교수님은 건축가 김정철 선생님과 동시대에 교육을 받았고 또 젊은 시절 같이 작품생활도 하신 걸로 알고있읍니다. 기억을 더듬어 그 시절의 우리나라 사회여건과 함께 당시의 건축적 경향 그리고 김 선생님의 작품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안영배. 김정철 씨와 나 사이는 건축을 통한 인연이 유달리 깊은 편입니다. 대학도 동문인데다가 졸업 후 직장도 종합건축연구소와 한국산업은행 주택기술실 등에서 약 7~8년간 같이 있었으니까 젊은 시절에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셈이지요.
종합은 당시 이천승(李天承) 선생님과 고 김정수(故金正秀) 선생님이 같이 경영하시던 건축 설계사무소로서 그 당시는 우리나라에서는 건축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었읍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종로의 종로서관 자리에는 영보빌딩이 있었읍니다. 종합은 이 건물 일층에 있었는데 여기에서 밤늦게까지 설계에 몰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종합에는 그 당시 계획 파트에 송종석宋鍾奭씨, 이기덕李起德씨와 함께 같이 있었는데 밤일 한답시고 저녁식사하러 나가서는 건축에 관한 정담으로 긴 시간을 보낸 적이 많습니다. 그리고 일이 늦어져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즐거웠던 시절로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건축가들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고집하는 성향이 있는데 김정철씨는 비교적 온건하고 부드럽게 표현하는 이른바 영국 신사다운 성품이었지요. 그러한 성품이 후에 팀웍으로 협동하는 큰 설계사무소로 발전시킬 수 있는 큰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종합에서는 국제극장 등의 설계를 같이 했었고 현상설계도 같이 해서 입상한 적이 있는데 의견 충돌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종합에서의 경험이 후에 김 선생에게는 어떻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까?

종합의 두 선생님(李天承氏와 金正秀氏)은 각기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를 선호하신 반면 르 코르뷔제(Le Corbusier)에 대해서는 좀 비판적이었읍니다. 이러한 두 분의 건축성향이 우리들에게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 같으며 정림건축의 많은 작품에서 이러한 영향을 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종합에 있었던 시기는 50년도 후반기였으며 6·25사변 이후 많은 도시 건물이 파괴되어 복구 건설이 시급히 요구되었고 경제적 빈곤에 의해 설계 시 경제성이 크게 중요시되었었읍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건축계에서는 경제성을 무시한 건축조형은 크게 억제되었으며 합리적 기능분석과 기술공학 개발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우선적 과제로 생각했던 시기였읍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모더니즘의 초기운동과도 부합되어 당시 종합에서 중요한 건축지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주의적 경향은 조형적 측면을 우선시하는 최근의 경향과는 대조되는 면이라고도 하겠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착실하게 겪고 넘어가야 할 과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김정철씨는 장남인데다가 은행사람들과 오랫동안 지내온 탓인지 단번에 여러 단을 뛰어오르려는 성급한 성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씩 하나씩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착실한 성품이어서 당시의 기능주의적 건축경향과도 잘 부합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정림의 초기 작품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삼양사 본사라던가 한국외환은행을 비롯한 일련의 은행건축에서 이러한 성향을 쉽게 볼 수가 있읍니다.

20년의 정림건축의 역사를 볼 때 작품 속에 반영된 건축적 경향의 새로운 면모가 보이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정림건축의 작품들은 호모토피아(Homotopia)적 질서체계를 갖는 건물들이 많았다고 봅니다. 호모토피아적 질서는 전체가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져야 하고 부분적인 요소는 전체를 위하여 종속되어져야 하며 개체로서의 의미는 상실되어져야 한다는 질서체계를 말합니다. 그와 상반되는 개념은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적 질서로 이는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개체 요소들이 나름대로 존재가치를 가지며 다양하고 복합적인 각각 사물들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구성미를 갖는 질서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대부분 완결된 질서를 갖게되는 것이며 정형화된 형태로 결론짓게 되고 반면 후자는 다양성과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비정형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정림건축은 70년대 후반부터는 초기 단계와는 달리 공간과 조형적 측면에 점차로 비중을 높여가고 있고 일상적이고 규칙적이며 정상적인 것을 깨뜨려 나가려는 노력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읍니다. 즉 정동제일교회와 전주서문교회 등이 그 좋은 예라 하겠읍니다. 이것은 정림건축이 제 2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정림건축에서는 10여년이 경과되면서부터는 그동안 양성해 온 젊은 파트너들의 협력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정림건축은 개성이 강한 한 건축가의 리더쉽보다도 팀웍을 통한 파트너들의 협동작업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신성한 면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림건축에서는 한 사람의 건축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극히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색이라 하겠읍니다. 예를 들면 상의회관이나 MBC방송국 등에서 보여지는 우아감이 감도는 정조형식(整調形式)의 경향이 있는가 하면 전주서문교회나 부산삼일교회 등에서 보여지는 율동감이 충만된 산조형식(散調形式)도 보여지며, 상무올림픽 레스링경기장에서는 구조적 표현을 대담하게 대두시키는 등 비교적 다양한 조형시도를 하고 있읍니다. 그러면서도 순수한 모더니즘의 경향을 지속하려는 노력만은 그래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 또한 정림건축의 특징이라고 하겠읍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김정철 씨의 온화하고 유연성 있는 그의 성품과 토탈디자인을 지향하는 협동적 건축태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 선생님의 조형 감각에서 어떤 면이 돋보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종합에 같이 있을때 느낀 것이지만 지금은 얼마 전 허물리고 만 국제극장 설계를 같이 하고 있을때 벽면처리에 유달리 관심이 많고 여기에 뛰어난 재능이 엿보였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의 건축자중 김중업씨와 김수근씨의 작품경향을 볼 때, 김중업씨는 선적구성(線的構成)에, 김수근씨는 매스구성(構成)에 탁월한 솜씨를 느끼게 되는 반면 김정철씨는 면적구성(面的構成)에 우수한 솜씨를 느끼게 합니다. 한국 외환은행과 대구은행 본점을 비롯하여 상의회관, 로열빌딩, 단국대학교 퇴계기념 도서관 등이 그 좋은 예라고 봅니다.

끝으로 성년기로서의 정림건축이 앞으로 나아갈 길과 전망 그리고 기대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십시요.

내가 김정철씨를 부러워하는 점의 하나는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기업인으로서도 우수한 역량을 나타내고 있는 점입니다. 설비와 구조분야의 폭넓은 기술진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욕에 찬 젊고 유능한 건축진들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토의해 가는 그의 건축태도가 오늘의 정림건축을 이룩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건축가들을 보면 조형감각에는 뛰어나나 기업적인 면에서 실패한 사람이 많으며 또한 이와 반대로 기업에는 성공하였으나 조형감각에 뛰어나지 못해 우수한 작품을 내지 못하는 설계사무소도 적지 않습니다. 이 양자를 겸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로 보여집니다. 이 양자를 잘 갖추고 있는 건축가 중 이오밍 페이(I. M. Pei)를 꼽을 수 있겠는데, 이러한 면에서 김정철씨는 한국의 I. M. Pei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팀워크를 통해서 토탈디자인적 개념하에 아름다운 건축환경 조성에 노력하는 그의 건축태도도 견실하거니와 그의 나이 이제 50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앞으로 좀더 발전적이고 성숙된 작품을 기대해보게 됩니다.

자료 및 정보 출처

정림 20주년 작품집 《정림건축 1967-1987》, 1987, pp22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