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을 위한 단상 건축가 84년 5월호

住宅을 위한 斷想

주택은 생활을 담는 그릇

주택이 타건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택의 규모나 형태와 무관하게 가정생활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미가 내재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백화점, 극장, 음식점 등의 건물은 이용자의 기호나 생활수준에 따라 선택, 이용되는 건물이지만 주택은 국민 누구에게든 이용되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게되며 지어진지 십여 년만에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되지 않는 한 건물수명만큼 존속하여 국민의 住生活에 기여케 된다. 일생중 가장 많은 시간을 주택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지만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가정이 유택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보금자리로서의 역할을 다할때 밝고 명랑한 사회도 가능하다.

소음과 대기오염,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등이 현대인의 생활을 피곤하게 만들지만 육체적, 정신적 휴식처로서의 주택이 이를 극복케 한다. 물리적으로는 최소규모의 건물이지만 중요성에서는 어느 건물이 이보다 앞서겠는가. 극한기와 혹서기의 기후에서 보호되고 육체적, 정신적, 휴식공간으로서의 주택의 의미는 변질될 수 없다. 급속히 이루어진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루게 되고 세대가 바뀌면서 도덕적 가치관마저 변천되어가고 있는듯 하지만 주택의 본질은 영원히 번화를 기대할 수 없다. 더 넓고 더 편안한 집은 모두의 소망이지만 그 소망은 단지 물리적인 소망일뿐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람직스럽지 못한 주택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많은 집들이 시간을 다투며 지어지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주택의 양산을 요하게 되고 복부인이네 투기네 하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키고 있으며 이에 편승한 상혼은 불량주택까지 양산하고 있다. 획일적이 콘크리트 평지붕으로 도시의 시각적 환경을 황폐화 시키더니 난데없이 불란서 스타일이라는 족보불명의 지붕이 집장사와 수요자의 야합으로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만연되어 눈시울을 찌푸리게하는 현상이 계속됨을 건축계는 개탄만 해서 될 것인가.

지하실은 물탱크로 변하고 지붕과 벽은 빗물이 새어 주택내부가 온통 곰팡이로 뒤덮인 연립주택에 관한 기사가 가끔 신문지상을 오르내린다. 겉만 번드레한 주택, 겁없이 사용한 주택이 산재하며 지금 이 시간에도 개선되지 않은채 지어지고 있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와우아파트 참사와 대연각호텔 화재는 남의 나라에서 생긴 일이 아니다.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연탄가스 중독으로 우리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는 곳이 주택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정신적 육체적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단란과 화목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것이 모여서 조화있게 형성된 마을로 변해가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느끼기에 우리는 슬퍼진다. 현행제도하에서 주택신축시 건축사의 설계와 감리를 제도화하고 있음에도 이같은 현상이 계속되는 것은 건축가 不在의 시대임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현재의 주택문제가 전적으로 건축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여건이, 땅과 주택에 대한 한국인 고유의 소유욕이, 주택을 사회적 지위의 표현수단으로 생각하는 일부 사고방식이, 장인정신이 결여된 시공자의 의식이, 돈만 벌겠다는 건축자재 생산업체의 무책임과 근시안적 주택정책이 주택문제를 어려운 국면으로 몰고 가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흙과 짚, 나무만으로 백여년을 지낼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선조들의 지혜를 전수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흙벽과 초가지붕으로도 혹한과 혹서를 막을 수 있었고, 초롱불 밑에서도 가정의 단란과 휴식을 찾을 수 있었는데, 더 크고 좋게 짓는다는 현대주택은 주택 본질보다는 물질적 크기만 늘려 놓은 결과는 아닌지 생갈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택규모의 차이는 불가피하겠지만 서울시의 경우 주택 공급율이 60% 전후이며 그 중 세계가족단체협회 기준 1인당 16m²에 미달하는 7평 미만이 주택이 6천 6백여채나 된다고 하니 건축사들의 관심이 서민주택에 돌려져야 함도 당연한 것 같다.

규모야 크든 작든 생활의 쾌적함을 돋우고 가사노동을 줄이며 가족단위의 생활을 추구하는 주택의 본질을 해결하고 아름답고 자랑스런 마을과 도시를 형성해야하는 책임과 보람을 나누어 갖도록 하는 건축사가 많을수록 주택에서 느끼는 슬픔은 감소되어 나갈 것이다. 또한 물질적 정신적 풍요가 깃든 주택의 설계와 시공을 우리 모두 추구해야 할 것이다.

주택설계의 어려움

주택설계는 건축설계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작업의 하나이다. 용도는 고사하고 몇천명의 건물, 기능과 요소를 수십평의 작고 알뜰한 공간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윤택한 생활이 영위되도록 구상되고 설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치의 면적을 아껴 저렴하게 지어지도록 설계해야 한다. 남녀노소의 성별과 세대차등 부부와 자식들 모두가 건축주이며 각양각색의 요구를 종합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 그리고 돈을 적게 들이며 문화적으로는 최고의 것을 요구한다. 오래 구상하고 여러 면을 검토해도 시간이 부족하며 규모에 비해 작업량은 많고 끝이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어떤 건축가는 “많은 설계활동을 했어도 주택설계는 아직 해볼 엄두를 못낸다”고 푸념한다. 그만큼 어려운 건 사실이나 귀찮고 까다롭다고 외면만 하면 생활의 지혜가 담긴 주택의 창출과 연출은 커녕 꼴볼견의 주택만 남게 된다. 또한 생활의 본질도 찾지못한 집을 만들게 되기 때문에 작고 어려우나 건축사 모두가 나름대로 참여하고 성의를 다해 설계 및 건축에 관계해야 한다.

주택설계의 바람직한 방향

住居란 가정을 중심으로 인간생활을 꾸려 나가는 공간 또는 埸을 말한다. 또 그것은 어떤 특정한 환경의 埸으로서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며 생명을 보호, 유지하고 개인적, 가정적, 사회 생활을 담든 시설이 된다. 이런 것에 대한 연구와 조화를 찾으며 인간생활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고 사회발전에 따르는 미래지향적 생활과학이 추구되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며 으리으리한 집이라 해도 삶의 즐거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外華內貧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집, 환경에 어울리는 집으로 볼 수 없다.

집은 남에게 보여주고 과시하기 위한 것도, 또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만도 아닌 가족이 다같이 애착을 느낄 수 있는 자랑스러운 공간과 분위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생활이 흡족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첫째, 생활의 행위로 볼때 인간의 24시간 활동이 생리적으로는 노동, 휴양, 여가로 구성되는 것과 같이 가정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피로회복의 공간 또는 埸이 되어야 한다.

둘째, 인간성을 중요시 하고 육성하는 문화적, 사회적 생활의 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한 생리적 휴양에 그치지 않고 독서, 음악, 종교, 교제, 오락, 스포츠, 취미 등의 교양을 높이고 인생을 풍부하게 하도록 희망한다. 또한 덕성을 닦으며 개성의 발전을 도모하는 등 문화적, 사회적 생활을 의도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이에 적합한 시설이나 설비가 필요하다.

셋째로는 생리적 생활이나 문화적 생활을 위한 시설이 갖춰지고 영양, 휴양, 보건, 교육, 교양, 오락 등의 소비생활이나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을 요하게 된다. 이것은 홈 메이킹(Home Making), 가정의 관리나 경영으로 주부의 노동에 해당하며 가정을 원만하게 운영하게 하는 역할과 책임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능률적으로 일하는 장소로서의 구조나 시설이 중요하게 된다.

근자에 이런 말을 흔히 듣는다. 주택의 설계, 시공 또는 매매에 있어서 가장의 역할은 경제적 측면에서 이고 사실상 매매행위는 주부의 결정권에 속하기 대문에 집장사들은 안방, 욕실 주방 등 여성의 기호나 환심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집이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발전과 경제, 문화생활의 수준향상으로 앞으로의 가정생활은 가족 모두가 생활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그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영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현대는 가족평등의 입장에서 서로가 협력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애정으로 결속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요건의 충족은 커녕 감안도 안된 집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에 마구 채워지고 있는 장기적 대처와 처방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전문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리라.

아름다운 良質의 주택

규모나 공간 그리고 재료사용에 있어 과욕을 낸 집을 흔히 접하게 된다. 이러한 주택은 세련된 조화와 모양을 만들기 이전에 다만 사회적 富의 과시로 그칠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다. 사면에 벽을 둘러치고 지붕을 씌우면 형태가 생기고 벽면에 창을 위한 개구부를 달고 외장을 구사하여 개성있는 표정을 주게되면 주택이 된다. 그림으로써 주위와 조화관계가 정립되며 동네라는 주거환경이 만들어진다.

대지와 주변환경의 여건 그리고 건축주의 희망사항 등을 토대로 만들어진 주택이 목적의식 없이 유행을 따라 안목없는 표현에 그쳤다면 이는 건축주, 건축사 모두의 책임이다. 건축주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주거생활에 대한 요구 또는 희망이 합리적일 수도 있으나 잘못된 경우가 더 많다.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하여 프로답게 제시하고 해결하여 이에 필요한 요소들을 건축적으로 조형화함으로써 아름답고 아담한 집과 환경을 만들어야 할 역할이 우리 건축사에게 있다.

돌이 깨어져 건축재가 되었을 때는 이미 무기질화 되어 있으나 石材의 디자인과 구사여하로 돌이 살아 숨귀는 것같이 될 수도 있고 죽어있는 돌로 그냥 있을 수도 있다. 용마루의 단면을 이상하게 구부려서 불란서식 집이라고 일반주민을 현혹하거나 재료의 특성과 색, 질감 등의 이해없이 남용한 예들을 하루속히 개선하여 시각적인 면에서도 수준 높은 주거환경을 만들어야겠다.

취락개조주택의 허점

고속도로나 지방도로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길에 면하여 일정하게 구획한 대지위에 천편일률적인 모양을 한 집들이 세워진 요즈음의 농촌주택들과 만나게 된다. 바둑판을 보듯 네모지게 자른 반듯반듯한 직선도로의 향과는 관계없이 도열해 앉아 있는 취락에서 도시적인 냄새는 풍기지만 농꾼들이 일손을 멈추고 이마에 흘린 땀을 팔꿈치로 훔치며 앉아 쉴 수 있는 여백이 결여되어 흙냄새와 같은 구수한 맛이 없음이 항상 안쓰럽다. 이런 주택들이 확 트인 들판에 옹기종기 뭉쳐 있어 농촌 풍경과 경관을 망쳐놓고 있다.

필요없이 높아진 지붕 속 공간은 농민들에게 무거운 부담만 가중시킨다. 우리의 적극적 참여도 결여되었지만 행정우위의 획일적 생각과 전시효과적 추구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주택공급기관의 전문화

주택설계의 어려움은 건축사 스스로 자기 집을 설계하고 감리해도 불만스럽기 마련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주택설계는 주택문제 전담기구에서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연구 개발을 필요로 한다. 주택설계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건축사나 사무소가 있기는 하나 아직 그 조직이 경험하고 축적한 노하우나 팀의 종합적 역량이 부족하여 계속 문제로 남는다. 우리의 주택공급은 최근 관주도형보다 민간기업 또는 집장사에 의하여 그 과반수 이상 제공돼 왔다. 특히 영세 집장사에 의하여 그 과반수 정도의 문제들을 노증시키면서 악화되어 간다. 인간생활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더라도 기술적 수준이나 시공상의 기본도 지켜지지 않은채 수익에만 눈이 먼 그들의 안목에 의하여 지어졌음으로 슬럼화를 초래하고 그 추악함을 도처에 확산시키고 있다.

새로 지었다는 집들을 머지않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할 때 사회적, 국가적 손실은 막대한 것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양질의 주택을 많이 공급하여 저질의 집장사 집을 추방할 수 있는 전문연구기관을 육성하는 장기적 대책의 입안운영이 시급하다. 그리하여 우리생활에 맞고 이웃과의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는 멋있는 공간과 기능, 값싸고 좋은 재료를 구사하여 완벽한 양질의 주택을 공급하는 방법을 하루속히 강구해야 하리라 본다.

자기 분수에 알맞는 주택

주택은 그 집을 사용할 식구, 즉 가족들의 생활을 담는 공간과 埸이다. 그 공간은 안전하고 포근하여 건강한 생활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대체로 우리 주거의 면적기준은 서구나 이웃 일본에 비해 과대한 편이다. 용도도 애매하고 사용빈도도 적은 방을 예비하는 경우 주부나 가족들의 가사노동만 늘릴 뿐아니라 관리유지면에서도 큰 부담을 주게된다.

재료의 선정과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예산은 적다고 하면서도 “누구네 집은 좋은 재료 썼으니 나도 쓰겠다”는 식의 건축욕구가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좋은 뜻의 격언을 잠시 잊게 하고 있다. 결국 자체의 선호경향은 예산이 더 소요되는 쪽으로 결정되는 것이 상례이다. 재료의 적재적소는 생활의 지혜에 속하며 건축주 가족의 교양과 格의 표현과도 상관된다. 아낄만하고 자랑스러운 공간을 마련한 집주인은 변화있고 실속있는 생활을 추구할 줄 아는 값진 생활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양질의 주택이 크고 호화로운 주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구나 생각을 다 반영하지 않아도 그 나라 그 수준에 걸맞으면서 아무 불편이 없는 집. 우리의 관습과 생활양식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평범한 집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주택이 아닐런지.

자료 및 정보 출처

《빛과 사랑의 건축》, 1992, 149~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