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하고싶은 일 건축가 89년 2월호

지난 해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고,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욕구분출이 두드러졌던 해이며, 세계의 인류가 서울에 모여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건축계에서도 UIA의 국제건축세미나 개최, 제7회 대한민국 건축대전등 특기할만한 역사적 행사가 많았던 多事多難한 한 해 였다. 이제 10년을 남겨놓은 세기말에 서서 1989년 새해를 맞이한 우리는 지난해 이상의 多事多難한 해가 되리라 여겨진다.

문화정책을 표방한 정부가 文化部의 신설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문화부에 대한 건축계의 기대는 무엇인가? 
아직도 건축이 미술의 한 분야인양 인식되고 있는 이 시점에 그리고 藝術院에 지금껏 한사람의 건축가도 추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축가의 직능확립을 늘 이야기하며 바라고 있다. 사회로부터의 필요성과 신뢰받는 일, 그리고 법적으로 뒷받침 받는 일들을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다. 우리는 건축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에 골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능확보와 건축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건축이 우리 생활주변의 모든 기반임이 인식되고 서구 선진국처럼 건축이 문화로 이해되고 건축가가 의사, 변호사와 같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 문화 후진국의 오명을 씻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지나온 반세기 동안에 서구문명은 이 사회와 생활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으며 건축에 있어서도 서구의 것을 모방, 흉내내는데 열중하고,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는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2차대전후 산업사회의 소산으로 금속과 유리와 콘크리트 등의 산업제품을 이용한 궷짝(box)형 건물이 유행하고 많은 합리적 기능주의에 의한 건축들이 세워져 왔다. 모더니즘의 키워드였던 “Less is more” 를 내세워 디자인의 절제가 마치 현대건축의 美의 극치인양 건축의 조형을 지배해 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서구인들이 2,3백년 걸려 이룩해 놓은 경제와 문화를 30년이란 짧은 세월에 선진국대열에 끼려고 노력하다보니 경제우선 기술만능의 사상이 지배하고 정신, 문화적 측면에서 뒤떨어져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멋, 우리의 것이 잊혀진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다.

우리의 환경속에 고유의 생활양식과 풍습들이 이어져 왔다. 기나긴 세월을 거쳐 격류와 흐르는 물결에 깎이고 닦여져 둥글고, 아름다운 자갈이 되듯이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는 다듬어지고, 남을만한 것만이 우리의 전통이 되어 이어져 왔다. 

지금까지 일제 식민지 교육과 제도를 벗어나지 못한 토양속에서 서양의 산업사회에 기반을 둔 합리적, 기능주의적 건축이 우리의 것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왔다. 건축에 있어 전통문제는 단순히 형태적 문제 뿐아니라 그 사상과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일본의 건축가 아시하라(戶原議信)가 미국유학 갔을때의 일이다. 그도 당시 서양건축의 조류였던 “모더니즘” 에 영향받아 누구나 하듯이 필로티와 연속창등 간결하게 디자인된 계획안을 지도교수에게 내놓았다 한다. 이리저리 안을 보던 지도교수는 “Be original” 이라 하며 무조건 서구건축을 흉내내는 것을 지적했다 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과 서양 것을 비교하여 그 차이와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한다. 서양의 것을 아무리 잘 흉내내고 모방한다 해도 서구의 역사와 환경과 삶은 그들 나름대로의 오랜 세월을 거쳐 닦고 길들여진 것이기에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삶의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풍토, 우리의 생활감정, 풍습과 문화가 담기고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 기초를 둔 내용의 건축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건축사상은 자연에 바탕을 두고 인간성을 중요시 해왔기 때문에 부락이나 마을을 보더라도 얼핏 보기에 무질서해 보이나 현대적 주거상황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유기적이라 할 수 있다. 주거공간만 하더라도 그렇다. 독립성이 보장되고 그 용도가 구분된 서양의 공간들에 비하여 우리의 온돌방은 밥상이 들어오면 식당이요, 요를 피면 침실이 되고 거기서 뒹굴기도 하며 책도 읽는 다용도의 다목적 공간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한 공간으로 여러가지 생활을 영위할 줄 아는 슬기를 가졌었다. 병풍은 가볍고도 신축성 있는 하나의 도구라 할 수 있다. 펴면 벽이 되고 접으면 공간이 하나로 통합된다. 병풍은 그 자체가 우리의 예술을 담고 있으며 아름답고 간편한 가변성 있는 movable한 벽이다.

이렇게 우리의 original한 것에 풍부한 내용과 멋진 공간과 요소들이 잊혀지지 않고 다듬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멋진 숨결을 되찾아 사회가 요구하는 이 시대의 건축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자료 및 정보 출처

《빛과 사랑의 건축》, 1992, 168~169쪽